에도성(江戶城)은 조선통신사 일행의 종착지였다. 에도는 현재의 도쿄로, 조선통신사가 오가던 시대에도 인구 100만이 훌쩍 넘는 번화한 도시였다. 조선통신사의 에도 숙소였던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와 센소지(淺草寺)를 거쳐 도시 중심부에 자리한 에도성은 조선 왕의 국서를 전달하기 위한 ‘국서전명식(国書伝命式)’이 행해진 중요한 곳이었다. 조선통신사가 에도성으로 향하는 길은 넘쳐나는 구경꾼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만큼 당시 통신사 행렬은 에도 민중의 지대한 관심과 선망어린 시선을 받을 수 있었다.
에도 막부는 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보통 2년 내지 3년 정도의 기간을 가지고 만반의 준비를 하며, 또한 통신사가 방문하는 해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에도 시가지 및 가옥의 환경 정비와 청소, 행렬 구경 시의 예의범절 등에 대한 주의사항이 담긴 법령을 내렸다. 에도 막부는 수도 에도의 입구 시나가와(品川区)에서부터 조선통신사 숙소 히가시혼간지 및 에도성에 이르는 모든 거리에 대해 수차례에 걸쳐 안전점검을 꼼꼼히 했으며, 국서전명식 당일에 도성 출입을 엄격하게 규제했다. 에도성 32개 성문 중에 국서전명식에 참가하는 막부 관료와 다이묘(大名) 출입문은 오직 오테몬(大手門)과 사쿠라다몬(桜田門) 두 곳만 허가되었다.
국서전명식 당일, 에도 막부 측의 호위 속에 숙소를 출발해 에도 성으로 향하는 조선통신사의 등성행렬은 그야말로 화려하고 웅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통신사 일행을 포함하여 이를 호위하는 에도 막부 측의 선두·후미 호위까지 포함하면 모두 2,200명 이상이나 되는 대규모 행렬이 에도 중심 시가지를 누비며 나아가는 모습이 어찌 장관을 이루지 않았겠는가.
에도성은 에도막부의 쇼군이 거주하는 혼마루(本丸)를 비롯하여 몇 개의 건물들로 구성돼있으며 혼마루는 다시 오모테(表·정부 청사 같은 곳), 나카오쿠(中奥·쇼군의 거주 공간), 오오쿠(大奥·쇼군 부인들의 거주공간) 등 세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국서전명식은 혼마루 오모테의 수많은 방 중에서 오히로노마(御広之間)에서 거행되었다. 오히로노마는 에도막부 쇼군의 신년 하례식 등과 같은 공식의례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매우 중요한 의례공간으로 알려졌다.
신묘(辛卯) 통신사행의 국서전명식은 1711년 11월 1일 오전 10시께 에도막부 제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가(徳川家宣) 오히로노마 상단, 중단에 로쥬(老中, 장관급), 하단에 관위 4위 이상 다이묘 등이 착석한 가운데 시작돼 오후 2시까지 이어졌다. 숙종 임금의 국서는 오히로노마 중단의 국서상자에 소중히 보관되고 쇼군은 에도까지 먼 길을 무사히 도착한 조선통신사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일행에게 술을 내린 뒤 의례를 마무리했다.
국서전명식이 행해졌던 옛 에도성의 중심지 혼마루는 1859년의 화재로 소실되고, 이어 에도 막부가 멸망하여 끝내 복원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천황이 거주하는 고쿄(皇居)의 부속 정원으로 공개되고 있다. 옛날 에도성의 장중했던 모습은 아니지만, 조선통신사의 발자취가 담긴 중요한 장소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