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廣島) 현에 위치한 시모카마가리(下蒲刈) 섬은 통신사들이 총 12차례에 걸친 사행(使行)에서 딱 한 번만 빼고 모두 들렀을 정도로 조선통신사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이 섬은 인구 3,000여 명의 작은 마을이지만 겨울에도 날씨가 따뜻하고 밀감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거센 바닷길에 지친 통신사들에게는 이곳에서의 휴식이 큰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위로는 지극정성으로 맞았던 섬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통신사 일행 중 우두머리인 정사(正使)로 파견됐던 조엄(趙曮))은 『해사일기(海槎日記)』에서 “쇼군이 조선통신사와 동행한 쓰시마 번주에게 ‘어느 곳에서의 접대가 최고였느냐’고 묻자 번주는 ‘시모카마가리가 제일이었다’고 답했다”고 적었다.
섬마을 사람들은 그런 인연을 잊지 않고 ‘조선통신사 자료관’을 운영하면서 통신사의 흔적을 기억하고 있다. 일본 내 유일한 조선통신사 자료관인 고치소이치방칸(御馳走一番館) 안에는 실물 크기로 복원한 정사·부사 직위의 복장과 통신사 행렬도, 통신사가 타고 온 배의 축소 모형 등 다양한 시각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 백미는 통신사들에게 제공되었던 상차림이다. 고치소이치방칸이란 이름을 풀어보면 '제일 맛있는 관'이라는 뜻인데, 그 이름처럼 이곳에는 통신사에게 접대한 요리가 전시돼있다. 보기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지는 융숭한 대접이다.
지역과 시점마다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시모카마가리에서는 보편적으로 정사·부사·종사관에게는 아침과 저녁마다 7가지, 5가지, 3가지 요리가 순서대로 나오는 7·5·3상을 들여보냈다. 하지만 이 요리들은 먹는 시늉만 하는 의식용 요리였고, 이후에는 국 3가지, 요리 15가지로 구성된 실제로 먹는 음식이 나왔다. 당시 에도 막부 연회 때 다이묘(大名·각 지방의 영토를 다스리고 권력을 행사했던 유력자)조차 국 2가지, 요리 7가지가 제공되었던 것에 비하면 통신사 삼사(三使)에게 제공된 상차림은 지극 정성을 다한 파격적인 접대였다.
이러한 상차림은 메뉴 구성에만 몇 달이 걸렸다. 『히로시마 번·조선통신사 내빙기(來聘記)』에 따르면 섬 주민들은 통신사 도착이 예정된 9월 전부터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1월에는 쓰시마 섬으로, 3월과 6월에는 아이노시마(相島) 섬을 비롯한 인근 통신사 방문지를 답사했다. 통신사들이 좋아했던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을 조사하고 술과 안주는 무엇이 적당한지 등 세세하게 탐문하기 위해서였다. 정보 수집이 끝나면 인근 마을에서 수백 명을 징발해 청소하는 사람, 물 나르는 사람, 불 때는 사람, 등불 켜는 사람, 소 돼지 닭 돌보는 사람까지 정해 일을 맡겼다.
시모카마가리 섬에서는 이런 융숭한 접대와 별도로, 통신사 예우에 대한 세부조항을 만들어 주민들에게 주지시켰다. 비좁은 길에서 조선통신사나 쓰시마 번주 등 통신사 일행을 만났을 때는 길을 비킨다, 조선통신사에게 붓이나 글을 요구하지 않는다, 식사에 대해서도 규정한 것 이외에는 권하지 않는다, 집을 청소하고 깨끗한 옷을 입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처럼 시모카마가리 섬 사람들은 통신사가 일본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갖고 떠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사실 정성 어린 접대 뒤에는 막대한 비용 지출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시모카마가리에서 통신사 대접에 쓴 비용은 3,000냥(1636년 기준)으로, 현 시세로 환산하면 12억∼14억 엔(약 114억 3000만∼133억 8000만 원)정도라는 분석이다. 이에 막부의 가신이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일본 조정에서 천자의 사자를 대접하는 데도 이러한 사례가 없다”며 간소화를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통신사에 대한 시모카마가리 섬의 극진한 대접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됐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