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즈오카 현(静岡県)에 위치한 세이켄지는 조선통신사의 숙박지와 휴게소로 이용되었던 사찰이다. ‘조선통신사 박물관’이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이곳에는 조선통신사의 족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에도 시대에 조선통신사가 시즈오카 지역을 지나간 것은 총 10회였는데, 그 중 세이켄지에서 숙박을 한 것은 첫 번째 사행이었던 1607년과 세 번째였던 1624년의 단 두 차례뿐이었다. 하지만 조선통신사는 나머지 사행 때도 잠시나마 세이켄지에 들러 쉬어가거나 유람을 할 정도로 이곳을 아꼈다.
그렇다면 세이켄지가 조선통신사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배경은 무엇일까. 가장 손꼽히는 것은 이곳의 빼어난 절경이다. 앞으로는 태평양이, 뒤로는 후지산이 펼쳐진 배산임해(背山臨海) 입지는 최고의 문인이라 불리던 조선통신사들의 창작욕을 자극했다. 1643년 사행의 부사 조경이 남긴 시문첩엔 ‘닛코 산 안에는 부도탑이 웅장하고 후지 산 앞에는 호수가 깊지만, 어찌 청산의 세이켄지에 빗대리’라는 극찬이 남아있을 정도였다. 통신사 방문 이후 『해사일기(海槎日記)』와 같은 사행록에 빼어난 경관이 전승되며 명소로서 이름을 높이기도 했다. 이처럼 세이켄지 풍광 속에서 여독을 씻고 시흥에 흠뻑 젖는 통신사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조선통신사 왕래를 열게 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의 인연도 큰 몫을 했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 첫 번째 에도 방문에서 돌아오는 길에 시즈오카 슨푸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예방한 바 있다. 당시 조선통신사에 대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환대는 대단했다. 그는 금으로 장식한 자신의 전용 호화 유람선 5척을 특별히 조선통신사에 제공해, 후지산과 미호 해변의 검은 모래 등 세이켄지 주변 경관을 둘러보게 했다. 이는 임진·정유재란에 대한 반성과 무력이 아니라 학문, 곧 문학의 힘이 잇는 조선과 교류하고 싶다는 진심을 보여준 것이다. 그의 특별한 환대로 인해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가졌던 적대감이 크게 해소됐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은 정서적 배경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은거했던 슨푸성 인근의 세이켄지에 다른 곳보다 더 많은 유묵이 남겨진 것이다.
세이켄지는 일본 내 사찰 중 조선통신사의 시문(詩文) 자료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1994년엔 조선통신사 유적으로 우리나라 국가지정문화재에 해당하는 ‘국지정사적(國指定史跡)’에 지정되기도 했다. 세이켄지에는 53편의 시와 2통의 편지 등을 수록한 『조선국통신사시문첩(朝鮮國通信使時文帖)』, 19개의 시판(詩板), 2폭의 괘폭장(掛幅裝) 및 7개의 편액(篇額) 등 다양한 자료가 존재한다. 시문자료뿐만 아니다. 사찰 경내에는 사찰 관계자와 나눈 필담, 사찰의 부탁으로 그린 수묵화 등도 잘 보존돼있다. 보존만 돼있는 것이 아니라 본당과 보물관 등 방문객들이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에 전시돼있다.
세이켄지의 종루(鍾樓·종을 단 누각) 현판에는 '경요세계(瓊瑤世界)'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1643년 방문한 조선통신사 일원 천문학자 박안기(朴安期)의 글씨다. 아름다운 옥(玉)을 의미하는 '경'과 '요'는 조선과 일본 두 나라를 비유하는 것으로, '양국이 만나 세상을 밝히는 장소'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역사적 원한을 넘어 문화교류를 펼쳤던 양국의 뜻이 담긴 곳. 세이켄지는 두 나라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열었던 흔적과, 그것을 정성들여 보존해나가려는 사찰의 의지가 자리한 곳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