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코네는 에도 최후의 방어선이자 후지산(富士山)으로부터 지근에 있는 험준하고 아름다운 명승지이다. 하코네는 활처럼 휘어진 일본 열도의 중간인 가나가와 현(神奈川県) 남서부 하코네 산 일대를 지칭한다. 특히 이곳의 명물은 북쪽에 위치한 아시 호(芦ノ湖)인데, 이 호수는 후지산의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칼데라 호이다.
하코네에는 해발 840m 지점의 정상에서 약간 내려간 곳에 일본의 4대 세키쇼(関所·관문) 중 하나인 하코네 세키쇼가 있는데, 이곳은 서일본의 여러 번에서 에도로 들어가기 위한 최종 관문이라 경계가 매우 삼엄한 곳이었다. 특히 통행증이 없으면 누구도 통과할 수 없었으며, 다이묘나 귀족 등 신분이 높은 사람들도 가마의 문을 열어놓은 채 모자를 벗고 지나가야 했다. 오사카 지방에서 도쿄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었기에 조선통신사 행렬도 이 길을 항상 통과하곤 했다.
1719년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쇼군직 습직을 축하하기 위한 통신사행의 제술관이었던 신유한(申維翰) 일행은 미시마(三島)에서 1박을 하고 해가 뜨자마자 출발하여 하코네 고개에 올랐다. 미시마에서 모토하코네(元箱根)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기로 유명했는데, 신유한은 그 지점을 이렇게 묘사했다.
해가 뜨자 출발하여 민가의 거리 7, 8리를 뚫고 지나 비로소 하코네 고개에 이르렀다. 길이 험준하므로 남녀를 메는 사람이 힘을 다하여 올라가는데 자주 바꾸어 쉬어도 오히려 숨결이 헐떡이고 급하였다. (중략) 봉우리 위로부터 조금 수백 보를 내려와서는 동부가 되었는데 사면에 산이 첩첩으로 껴안았고 가운데는 호수가 있어 주위가 수십 리나 되는데 깊고 넓고 검푸르다. (중략) 솔, 삼목, 단풍, 대나무가 푸르게 우거졌고, 떨어진 노을 나는 새는 가을 물결과 더불어 명미함을 다투는 듯하다. (중략) 이에 이르러 보는 사람들이 크게 즐거워하고 의심하여 ‘천 길 산 위에 어디로부터 동정호의 기이함을 얻었는고! 이제 비로소 조물주의 수단을 편벽되게 왜놈들을 위하여 허비한 것임을 알겠구나’하였다.
하코네에 대한 신유한의 글은 통신사 일행이 일본에 대해 가진 이미지를 순화시키는 데 하코네 일대의 풍광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조선통신사 행렬이 단순히 자연을 감상하고 지날 만한 행렬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조선통신사에서는 하코네를 아름다운 자연으로만 묘사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1643년 통신사행의 부사로 참여했던 조경(趙絅)은 남긴 시문을 통해 하코네의 경치를 단순히 좋다고만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심사를 강하게 노출시켰다. 원수를 갚기 위해 자신과 가족을 버린 자객을 떠올린 것은, 당시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기였음을 감안한다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찍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곳과 인접한 오다와라(小田原)의 호죠(北條) 씨를 정벌하여 일본 통합의 기틀을 다졌으며 결국 임진왜란의 흉모를 이곳에서 이루었기 때문에 이곳을 지나던 조선통신사들의 심사는 매우 복합적이었으리라 본다. 몇몇 통신사 일행은 이곳의 경관을 묘사하면서 역사적인 의미나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기도 하였는데, 대부분의 사행록에서 하코네는 사행에 참여한 지식인들의 정서적 촉수만을 자극하는 요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는 하코네의 좋은 풍광이 긴 여정으로 피곤해진 지식인들의 자의식을 무디게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