슨푸성(駿府城)은 조선통신사 왕래를 열게 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유년 시절 이마가와 가문의 인질로 붙잡혀 슨푸(현재의 시즈오카 지역)에서 생활했던 이에야스는, 훗날 슨푸 지역 영토를 손에 넣은 뒤 1589년 이마가와 가문의 저택이 있던 장소에 성을 축성했다.
이에야스는 슨푸성에 머물며 태상왕(太上王·현재 국왕에게 왕위를 물려준 이전 국왕을 부르는 칭호)으로서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의 후견인 역할을 맡아 국내 통일과 외교 정책에 진력했다. 이때 그가 외교력을 집중하여 공을 들인 것이 바로 조선통신사다.
1607년 제1회 통신사 일행은 슨푸성에 기거하던 이에야스에게 선조(宣祖)가 쓴 국서를 전달하겠다고 통보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나는 아들 히데타다에게 쇼군 직을 양위했으니 먼저 에도로 가서 그에게 국서를 전한 뒤 돌아오는 길에 들러달라”라고 했다. 그러면서 통신사 일행에게 자신의 유람선 5척을 내주고 스루가 만(駿河湾)에서 주변 경승을 즐기며 뱃놀이를 하도록 배려하는 등 극진히 대접했다. 여기에 우리 통신사도 화답하며 이후 우호적인 문화교류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처럼 이에야스 시대와 조선통신사 사이의 인연은 슨푸성으로부터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슨푸성에선 조선 금속활자 문화의 흔적도 엿볼 수 있다. 성의 셋째 성곽인 산노마루(三の丸)에는 과거 금속활자 인쇄시설이 있던 곳이 빈터로 남아 있다. 우리나라는 고려 고종 21년(1234년)부터 금속활자를 쓰기 시작했으나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전까지는 목판인쇄만 사용했다. 그러다 임진왜란 때 한양을 침공한 왜군에 의해 방대한 서적과 함께 우리의 귀중한 금속활자가 몽땅 약탈되었다. 한양에서 약탈해온 금속활자는 이들이 처음 손에 넣어본 귀중한 새 기술이었다.
만년에 이에야스는 슨푸성에서 은거하며 성 안 산노마루에 금속활자 인쇄 시설을 갖추어 놓고 『대장일람(大藏一覽)』, 『군서치요(群書治要)』라는 책들을 출판하도록 했다. 이때 쓰인 활자가 서울에서 약탈해간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한반도에서 건너간 최신의 인쇄 기술에 이에야스가 직접 큰 관심을 기울인 것만은 틀림없다. 인쇄를 담당했던 기술자는 임오관(林五官)이라는 조선인으로, 전쟁 때 금속활자와 함께 잡혀간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슨푸성은 1635년 전쟁 중 발생한 화재로 인해 성의 일부가 파괴되었다. 이때 성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천수각이 소실됐지만 재건되지 않았다. 그래도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만든 못인 해자(垓字)는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슨푸성의 둘째 성곽인 니노마루(二の丸) 동쪽에는 해자 위에 히가시고몬(東御門)과 3층식 이중 망루인 타츠미야구라(撰櫓)가 나란히 서있다. 이 두 건축물 역시 천수각과 함께 소실됐었지만, 최근에 다시 복원되었다. 이중 타츠미야구라는 슨푸성 성내에서 가장 높고 아름다운 건축물로 손꼽히기도 한다.
1616년 4월 이에야스가 슨푸성에서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자신을 이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묘소와 신사가 조성됐다. 또한 현재 산노마루에는 시즈오카 현청 등 공공시설물이 들어서 있고, 혼마루(本丸)와 니노마루는 ‘슨푸 공원’이란 이름으로 시민들에게 개방되어있다. 슨푸공원에는 이에야스가 직접 심은 귤나무와 함께 그의 동상이 나란히 서있다. 동상은 매를 손등에 앉힌 이에야스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이는 매 사냥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담아 만든 것이라 전해진다. 이처럼 슨푸성은 조선통신사를 통해 조선과 일본 양국의 문화 융성을 꿈꿨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생애가 깃든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