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선각자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1668∼1755)는 조선통신사들이 오가던 에도 시대 외교관이자 유학자였다. 일본에서 최초로 조선말 교본을 만들고 통신사들과 깊게 교유했던 그는 ‘우삼동(雨森東)’이라는 조선 이름을 가질 정도로 조선을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본래는 지역 영주의 집안이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일파에 의해 화를 입고 몰락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청소년기에는 교토로 나와 의학을 배웠다. 14세였던 1682년 교토에 7차 통신사가 방문했을 때, 그는 온 마을이 환영 인파로 들썩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자신의 스승이 통신사들에게 시문(詩文)을 보이고는 칭찬을 받으며 매우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이후 그는 진로를 바꿔 당대 최고 성리학자였던 기노시타 준안(木下順庵)의 문하로 들어갔다. 기노시타 문하에서 뛰어난 제자로 꼽혔던 그는 스승의 추천으로 1689년 쓰시마 번(對馬藩) 관리로 근무하게 됐다. 9년 뒤인 1698년 조선방좌역(朝鮮方佐役·현 차관급)에 임명돼 본격적으로 대(對)조선 관련 업무를 맡았고, 1702년 처음 부산 땅을 밟아 3년 동안 일본인 특별거주지이자 일본에서 온 사신들을 접대하는 시설이 있던 부산 왜관에서 일하게 됐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말 배우기에 몰두했다. 당시 조선 통역관들을 위해 일본어 사전인 『왜어류해(倭語類解)』 편집을 돕던 그는, 일본 통역관들을 위해 『교린수지(交隣須知)』라는 조선말 교본을 쓰기에 이르렀다. 일본 최초의 조선어 학습서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에는 경상도 사투리도 상당수 있어 그가 사투리까지 구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책은 메이지 초기까지 널리 읽혀 일본 내 조선말 보급에 큰 역할을 했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접대와 문서를 관리하는 진문역(眞文役) 자격으로 1711년과 1719년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 행렬을 에도까지 안내했다. 1719년 사행을 함께하며 우정을 쌓았던 신유한(申維翰)은 사행록 『해유록(海游錄)』에서 “한어(漢語)에 능통하고 시문에 밝은 일본에서 제일가는 학자”라고 그를 평했다. 두 사람은 긴 여정을 함께하며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신유한은 작은 일에도 쉽게 흥분하는 호슈의 기질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그의 자질과 능력, 탁월한 식견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했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각 번의 문인과 신유한의 만남을 중개했으며 일본인들의 시문 요청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통신사가 조선으로 돌아갈 때 그는 눈물을 흘리며 신유한을 배웅했고, 신유한은 쓰고 있던 유건(儒巾·선비들이 실내에서 쓰는 모자)을 건네며 이별의 선물을 주기도 했다.
아메노모리는 조선과 일본의 관계에 있어 ‘성신지교(誠信之交)’의 정신을 강조했다. 이는 "진실과 신뢰를 가지고 교류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1728년에 쓴 대(對)조선외교 지침서 『교린제성(交隣提醒)』에 집약되어 있다. 책에서 그는 ‘조선의 독자적인 문화와 풍습을 무시하고 일본 문화로 사고하게 되면 편견과 독단이 생겨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며 교류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존중과 배려를 강조했다. 그는 또한 임진왜란에 대해 ‘명분 없는 살상극’이라 평했으며, 조선인 귀와 코를 베어와 묻은 귀 무덤을 두고 ‘일본의 불학무식(不學無識)을 드러낸 것’이라고 개탄했다. 1755년 쓰시마 섬에서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고인은 현재 쓰시마 섬(對馬島) 이즈하라(嚴原町)에 부인, 아들과 함께 나란히 묻혀 있다.
그의 고향인 시가현(滋賀縣) 다카쓰키(高月) 아메노모리(雨森) 마을에는 아메노모리 호슈 기념관이 건립되어 조선과 일본의 친선 교류에 힘쓴 그의 행적을 기리고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