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동학농민운동을 평정한다는 명분으로 벌어진 청일전쟁 직후 1895년 4월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을 맺은 장소로,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슌판로(春帆樓) 안에 있다. 아카마 신궁 바로 옆이기도 하다.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한반도를 그 세력권에 넣어 대륙진출의 발판으로 삼게 된다.
1895년 3월 20일부터 요정(料亭) 슌판로에서 청일전쟁의 강화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는 일본 전권대사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무쓰 무네미쓰(陸奥宗光), 청나라 전권대사 리홍장(李鴻章)을 비롯한 양국 대표 11명이 참석했다. 강화를 위한 회의는 여러 차례 거듭 반복되다 4월 17일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기념관은 청일강화회의와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의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기 위해, 1937년 6월 강화회의의 무대가 된 슌판로의 바로 옆에 개관되었다. 강화회의에서 사용된 비품, 양국 전권대사인 이토 히로부미와 리홍장의 유묵 등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관내 중앙에는 강화회의 공간을 재현해 당시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1895년 3월 24일 제3차 회의를 마친 리홍장은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코야마 토요타로오(小山豊太郞)라는 청년에게 저격 당해 회의가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리홍장의 회복으로 4월 10일 회의는 재개되었으며, 사건 이후 리홍장은 큰 길을 피하고 산길로 왕복했다고 한다. 이 길은 후에 '리홍장 길' 이라 불리게 되었다.
슌판로는 원래 아미타지(阿彌陀寺)의 방장이 머물던 곳으로, 절이 폐사된 후 부젠(豊前)지역 출신 안과의사 후지노 겐요(藤野玄洋)가 인수해 진료소로 운영하다가 겐요 사후 미망인이 여관 겸 요정으로 경영했었다. 1895년 3월에 열린 청일강화회의 장소로 사용되면서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시모노세키조약이란?
청일전쟁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일본이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당시 지명은 馬關(마관)으로, ‘마관조약’이라고도 함)에서 청나라와 체결한 강화 조약으로 여기에서 조선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조선의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에 군사를 보낸 청・일 두 나라는 전쟁을 일으켜 그 전선(戰線)이 만주까지 확대되었으며, 청나라가 연패를 거듭하자 미국의 중재로 1895년 2월 1일부터 휴전, 강화를 위한 협상에 들어가 4월 17일 전문(全文) 11개 조항의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시모노세키 조약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권의 확립, 랴오둥 반도(遼東半島)와 펑후도(澎湖) 등에 대한 영토 분할, 배상금 획득 등을 조약 내용으로 했다. 이 조약에 따라 청은 조선의 독립을 인정했고, 일본은 조선에 대한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지배권을 확립했다. 또 청나라는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 및 펑후도 등을 일본에 할양했으며 일본에 배상금 2억 냥을 지불했다. 그 외 청나라의 사스(沙市), 충칭(重慶), 쑤저우(蘇州), 항저우(杭州)를 개방하고 일본인의 거주, 영업, 무역의 자유를 승인했다. 이로써 청의 약체가 폭로되자 서양세력은 다투어 중국에서 이권을 획득하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