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京都)시 히가시야마(東山) 구에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이 조선인의 귀를 베어와 묻은 귀무덤이 있다. 귀무덤은 석축을 쌓은 위에 우리나라의 무덤 모양을 한 봉분이 있고, 봉분의 꼭대기에 5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귀무덤은 인근에 있는 호코지(方廣寺)의 돌 축대와 함께 교토시의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귀뿐 아니라 코를 묻었다고 하여 코무덤(鼻塚)이라고도 한다.
일본은 1592년에 20만 명, 1597년에 14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했다. 전쟁을 지휘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전쟁터에서의 공적을 평가하기 위해 조선인의 머리를 베어오게 했다. 그러나 머리는 부피가 너무 컸기 때문에 2차 침략 때는 머리 대신에 귀나 코를 베어오게 했다. 일본군은 전쟁터에서 베어낸 귀와 코를 항아리에 담아 일본으로 보냈고, 도요토미는 이 항아리를 가지고 오사카(大阪)와 교토를 돌면서 사람들에게 보인 다음 교토 다이부쓰지(大佛寺) 서쪽의 현재 자리에 묻도록 했다. 귀무덤에는 적어도 10만 명 이상의 귀와 코가 묻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1625년에 다이부쓰지를 방문한 강홍중(姜弘重)은 그 앞에 언덕과 같은 봉분과 석탑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주변에 있던 사람에게 물어 이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 아들인 히데요리(豊臣秀賴)가 조성한 것임을 알았다. 강홍중은 이곳에 ‘조선 사람의 귀와 코를 묻었다’, ‘진주성이 함락된 후 그 수급(首級)을 묻었다’라는 말을 듣고는 원통하고 분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고 했다. 1643년에는 정사 윤순지(尹順之)와 종사관 신유(申濡)가 도쿄에서 쇼군을 만난 다음 교토에 도착하는 길에 다이부쓰지를 관광했다. 그러나 부사였던 조경(趙絅)은 다이부쓰지에 들르지 않고 곧장 숙소로 가버렸다. 이때까지 다이부쓰지는 통신사가 방문하는 관광지 중 하나였다.
다이부쓰지에서 통신사를 위한 연회가 열린 적이 있었다. 1711년에 도쿠가와 막부는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의 건의를 받아들여 통신사에 대한 접대를 간소히 하는 대신 돌아가는 길에 다이부쓰지에서 연회를 베풀어주도록 했다. 귀한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조선의 사신들에게 인근에 있는 귀무범의 존재를 상기시키면서 은근히 위협을 가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1719년 통신사가 교토를 방문했을 때 쓰시마 섬(對馬島)의 도주(島主)는 막부의 명령이라며 다이부쓰지 연회에 참석할 것을 요청했다. 정사 홍치중(洪致中)은 이 사찰이 조선의 원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원당(願堂·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던 법당)이므로 참석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원수가 지은 사찰에서는 술을 마실 수 없으니, 사찰의 문 밖에 장막을 치거나 아니면 민가에서 마시겠다는 것이었다. 이튿날 교토의 책임자가 『일본연대기』란 책을 내보이며 이 절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원당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다이부쓰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이 된 해에 중건된 절인데, 그때는 도요토미의 자손이 섬멸되어 남은 종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위조된 책이었다. 이후 홍치중은 부사 황선(黃璿), 제술관 신유한(申維翰)과 함께 다이부쓰지의 연회에 참석했다. 그렇지만 종사관 이명언(李明彦)은 끝까지 참석하기를 거부했다. 조선으로 귀국한 후 연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조정의 지탄을 받았는데, 이로 인해 다이부쓰지의 연회는 더 이상 열리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