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코네 성의 남쪽 조선인가도에 면해 있는 절로, 에도 시대에는 절의 경내가 7,000평이 넘는 대가람(大伽藍·가치가 높거나 규모가 큰 절)이었다. 하지만 메이지 초기 배불정책으로 면적이 절반으로 줄어들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소안지에는 정사가 숙박했고, 일대의 다른 사찰과 일반 주택 126채를 빌려 조선통신사 사행단과 일본의 역관 수행원들이 머물렀다.
소안지는 히코네 번주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의 부인을 기리는 보리사(普提寺)였다. 히코네 번의 접대가 호화로웠고 병풍의 장막이 수려하고 손을 씻는 그릇은 금 도금이었다는 바로 그곳이다. 조엄(趙曮)이 『해사일기(海槎日記)』에 “사람과 문자의 번성함, 저잣거리의 은성(殷盛)하고 풍족한 모양은 오사카에 버금간다”라고 기록한 곳이기도 하다.
이 사찰에는 특이한 문이 하나 있다. 사찰 정문에서 남쪽으로 10m 떨어진 곳에 따로 나 있는 구로몬(黑門)이 그것이다. 조선통신사에 대한 대접이 아주 융숭했던 히코네는 삼사에게 육류 등 특별한 음식을 접대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사찰의 정문으로 육류를 반입하는 것이 무엄하다고 하여 따로 작은 문을 만든 것이다. 구로몬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이 문이 검게 칠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에 대해 일부 오해도 있었다. 옛날 일을 잘 모르는 소안지 측에서 조선통신사가 조공사(朝貢使)이기 때문에 절의 정문을 드나들지 못하고 따로 구로몬을 내어 이곳을 이용했다는 안내문을 세워놓은 것이다.
재일사학자 이진희 교수 등이 이 안내문 간판을 발견하고 조선통신사의 의의와 내력, 그리고 당시 히코네 성에서 통신사 일행을 얼마나 정성을 들여 융숭하게 대접했는지를 설명하고 잘못된 안내문을 고치게 했다. 그러나 사찰 측은 꽤 오랫동안 안내간판을 시정하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야 이를 고쳤다. 어쨌거나 구로몬은 당시의 조선통신사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하겠다.
또한 이 사찰은 히코네시 지정문화재 <조선고관상(朝鮮高官像)>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는 두루마리에 그려진 세로 2m, 가로 1m의 대형 초상화다. 이 초상화를 소개한 사찰 안내 소책자에는 ‘조선국왕회상(朝鮮國王繪像)’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학 두 마리가 수놓인 흉배(胸背)를 단 관복 차림이다. 이 흉배는 주인공이 조선조 문관 당상관(堂上官·정3품 이상)의 정장임을 뜻한다. 조선의 왕이라는 사찰 측의 주장은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왜 당상관의 초상화가 삼사 숙소였던 사찰에 남아 있는 것일까? 통신사 일행이 가지고 와서 그만 놓아두고 간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될 뿐이다. 정사 가운데 누군가가 놓아두었을 가능성도 있다. 정사 조태억(趙泰億), 홍치중(洪致中), 홍계희(洪啟禧) 중 한 명일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