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9년에 고우사이쇼운(香西誓雲)이 세운 절로, 1764년 통신사의 일행이었던 김한중(金漢重)의 묘비가 있으며, 최천종(崔天宗)의 공양도 행해지고 있다.
조선통신사 사행길은 여행 기간이 길고 환경이 좋지 않아 환자도 자주 발생했다. 고급 의료진이 동행했지만, 특히 병이 심한 사람에게는 속수무책이었다. 1764년 사행 때에는 소동(小童)인 김한중이 중병에 걸렸다. 그는 오사카 도착 전에 이미 병이 심해져서 오사카에서는 일행과 함께 상륙하지도 못하고 배에 머물렀다. 그러다 병세가 더욱 깊어지자 요양을 겸해서 선박 계류지와 가까운 곳에 있는 절 치쿠린지로 옮겼다. 절에서는 정성을 들여 간호했으나 그는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숨지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22살이었다.
그는 숨지기 전 고향에 두고 온 두 아들이 그리워 눈물을 흘리곤 했다. 이를 가엾게 여긴 절의 주지가 김한중의 아이들과 나이가 비슷한 두 아이를 동네에서 데려와 김한중과 함께 놀면서 그를 위로하고 그리움을 달래도록 했으나 모두 허사였다. 봄이라기에는 아직 바람이 차가운 그 해 2월 10일, 그는 고향을 그리는 절시(絶詩) 한 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이 시는 치쿠린지 뒷마당 한쪽에 있는 비석에 음각(陰刻)되어 있다. 절 주지에 따르면 김한중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고향인 부산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 절에서는 지금도 매년 2월 10일, 김한중의 영혼을 달래는 법요식(法要式·절에서 이루어지는 주요 의식)을 치른다.
김한중의 경우는 사고사가 아니라 병사였다. 그러나 김한중이 병사한 그 해에는 살인사건에 의해 통신사가 사망하는 불행도 겹쳤다. 도훈도(都訓導·사행의 길을 열고 지휘하는 무관)인 최천종이 에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오사카의 숙소에서 일본인 안내원의 칼에 찔려 피살된 것이다.
통신사 일행은 에도에서 국서를 교환하는 등 외교적인 의전행사를 끝내고 귀국을 위해 육로로 오사카에 도착했다. 출발할 때 숙소로 이용했던 니시혼간지(西本願寺)에 도착한 것은 1764년 4월 7일. 정사 조엄이 새벽에 잠자리에서 최천종이 피습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즉시 군관과 의관을 현장으로 보내 긴급 처치를 하도록 명했으나 해가 뜰 무렵 최천종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정사 조엄은 이 사실을 일본 측에 통고하고 범인 체포를 요구했다. 호위를 맡은 쓰시마 측은 범인 색출을 위해 군사 2,000명과 600척의 선박을 동원해 육상과 해상에 경계망을 펴고 범인 색출에 나섰다. 최천종 주변에서 근무한 일본인을 전부 소집했는데, 수상하게도 역관인 스즈키 덴조(鈴木傳藏)만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혐의가 좁혀지자 범인 자백서를 보내고 도망쳤다. 니시혼간지를 빠져나가 오사카를 벗어나던 그는 이내 잡히고 말았다.
니시혼간지에서 심문을 받은 스즈키 덴조는 범행 모두를 자백했다. 조선 역관과 군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5월 2일 그는 사형을 당했다. 정사 조엄은 부하 김광호(金光虎)를 시켜 최천종을 장사지내고 범인을 잡았다고 고함으로써 그의 영혼이라도 위로하라고 지시했다. 최천종의 시신은 치쿠린지에서 조선식으로 장례를 치른 뒤 조선으로 옮겨졌다. 그 후 최천종의 위패를 치쿠린지에서 모셔와 그의 영혼을 달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