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란 진흙 속의 연꽃
요즈음 한일 관계는 진흙처럼 차갑고 어둡습니다. 임진왜란 직후 조선을 떠난 통신사들이 마주했던 현실 또한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조선통신사가 느꼈던 복잡한 심정과 사명감을 느끼며 시작한 답사였습니다.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를 거쳐 히로시마와 오사카, 교토, 도쿄에 이르기까지 약 30여 군데에 달하는 역사적 흔적이 남겨져 있는 현장에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역사는 유적과 유물을 남기며, 유적과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라는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가 마주하는 조선통신사의 역사 유적들은 저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귀 기울였습니다.
조선통신사의 역사는 저에게 두 가지 교훈을 주었습니다. 첫 번째는 각국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국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습니다. 1604년 조선 피로인을 쇄환한 사명대사는 단노우라에 몸을 던져 비참하게 죽은 안토쿠 천황을 모시는 아카마 신궁에서 그를 조문하는 시를 지었습니다. 이후에 통신사들 또한 그 운자를 따서 여러 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통신사와 깊게 교유하고 조선을 사랑했던 아메노모리호슈는 조선말을 배우고 조선의 문화를 일본인들에게 전하여 양국의 문화적 오해를 풀고, 좋은 관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주셨습니다. 또한 현재 치쿠린지에서는 병에 걸려 죽은 소동 김한중의 영혼을 달래는 법요식을 치러주시곤 합니다. 이렇게 양국의 문화와 역사를 배워 한국과 일본이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는 서로가 서로에게 배운다는 점입니다. 일본은 조선의 선진문물을 배우고, 한국 또한 일본의 도시문화 및 독자적으로 발전한 문화를 배워 교류했습니다. 한 국가에서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선과 일본은 서로의 장점과 우수한 점을 배우고 반영하고 발전해왔습니다. 그 중심에 동아시아에 통용되는 한자(漢字)가 있었습니다. 한시(漢詩)를 통해 소통한 조선통신사처럼 오늘날 저희는 간사이 대학교 학생들과 교류했습니다. 처음에는 서투른 일본어 실력에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함께 논의하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배운다는 자세로 임하여 마음으로 통할 수 있었습니다. 3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헤어질 때에는 아메노모리호슈와 신유한의 관계처럼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있었습니다. 진실한 교유(交遊)는 열린 귀와 마음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배울 때 가능함을 깨달았습니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도 깨끗하고 고귀한 자태로 성장하는 꽃입니다.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꿋꿋이 살아내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과거 진흙 같았던 한일 관계의 중심에는 ‘성신(誠信)’과 ‘신의(信義)’의 마음을 가지며 ‘교린(交隣)’하였던 조선통신사가 있었습니다. 많은 유적과 유물이 증언하듯 그들은 평화라는 연꽃을 피워내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조선통신사의 정신을 계승하여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역사와 공통점을 함께 모색하고 이야기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