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가 되어 돌아오다
- 신 대학생 조선통신사를 마치며 -
<대학생 신 조선통신사>. 프로그램의 제목을 보는 순간 나는 어떤 것에 이끌린 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지원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합격자가 된 후에는 대학생이 되어서 맞는 ‘첫’ 방학을 ‘첫’ 대외활동으로 장식할 수 있겠다는, 그저 부푼 마음만을 가득 품은 채 출발 일자만 기다렸고 그렇게 6월 25일, 부산 역으로 향하는 ktx에 몸을 실었다.
손승철 교수님의 온라인 강연과 동시에 탐방 일정이 시작되자, 마냥 들뜨기만 했던 마음도 어느새 진지해졌다. ‘역사는 유적과 유물을 낳고, 유적과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 ‘역사는 점과 선과 면의 스토리 텔링이다’, ‘여행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다’. 교수님께서는 이번 답사에서의 화두를 이렇게 크게 3가지로 나누어 제시하셨다. 우리가 앞으로 몸과 마음을 통해 8박 9일간 남기게 될 발자국들이 하나의 점이 되고, 그 점들이 모여 선을 이루고, 그 선을 통해 한일 관계의 한 면을 이루게 된다고 생각하니, 부산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 전과는 사뭇 다른 차원의 떨림이 가슴속에서 일어났다.
부산의 영가대, 아카마 신궁, 조선인가도……. 탐방 기간 중 아주 많은 장소를 답사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오래 간직하면서 두고두고 꺼내보고 싶은 기억을 크게 3가지로 줄여 말할 수 있겠다. 첫 번째로, 6월 27일 간사이 대학 학생들과의 한일 대학생 교류회이다. 국적, 언어, 모든 것이 달랐고 처음만난 사이었지만 식사도 같이하고, 발표 준비도 하며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교류를 했다. 서로 직접적인 대화를 할 순 없었지만 400년 전 조선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대화 대신 필담을 나눴던 것처럼, 우리는 짤막한 영어와 일본어로, 때로는 번역기를 이용하여 서로를 알아갔고, 같으면서도 다른 양국의 문화를 전했다.
다음으로, 6월 28일 교토에서 방문했던 고려미술관을 꼽고 싶다. 6살 때 일본에 건너가 파친고(일본의 도박게임점)를 운영하며 모은 재산으로 일본에게 빼앗긴 조선의 문화재들을 직접 구입한 정조문 선생님에 의해 설립된 미술관으로, 현재는 장남 정희봉 선생님께서 그 곳을 물려받아 관리중이시다. 조국에 돌아가실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망하며 한 평생 조선의 문화재 보존에 힘쓰셨다는 정조문 선생님의 발자취를 그대로 담아낸 정희봉 선생님의 열정 가득한 설명을 들으며, 나는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마지막으로, 6월 30일 저녁, 자유 외출 시간에 방문했었던 시즈오카 역 부근 어묵거리에서의 경험이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큰 목소리로 환영해주시던 주인 할머니와 손님들 덕분에, 진정한 일본 현지의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었다. 일본으로 역사 여행을 오게 된 한국의 대학생들이라고 우리를 소개하니 한국 여행 때 경험 하셨던 음식문화를 즐겁게 이야기 해주시던 그 분들의 표정은 일주일 남짓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가 다 같이 사진을 찍으며 ‘하나, 둘, 셋’을 외치자, 한국어로 숫자 세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하셨고, 우리는 숫자 세는 법을 가르쳐 드리며 그날 낮 답사지에서 받았던 아메노모리 호슈의 한국어 교과서 인쇄본도 선물로 드렸다. 우연히 가방 안에서 발견한 그 종이 한 장으로, 발음이 비슷한 단어들을 함께 찾아보며 우리는 한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400여 년 전, 조선과의 성신외교를 주장하던 일본의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의 바람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되는 순간이었다.
어묵거리에서 함께한 사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8박 9일간의 여정 속에서 이루어진 현지인들과의 소통,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다니며 조원들과 나눴던 생각들……. 혼자였으면 절대 경험하지 못했을 특별한 체험들을 20대의 초입에 하게 되어서, 인생이라는 하나의 역사에 큰 점을 찍을 수 있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다. 21세기에 파견된 신 조선통신사로서의 임무를 마치며 한국으로 돌아가는 내 발걸음이 가벼웠던 이유는 바로, 이 경험들을 통해 여행 초입에 마주한 화두에 대한 답을 찾았음에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