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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후기

황교신(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한국과 일본은 양국의 우호와 공존의 상징이었던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를 유네스코에 등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이번 대학생 조선통신사 답사 또한 해당 사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에 교린을 위한 사절단 파견을 끈질기게 요청하였다.

조선은 이를 거부하다가 1604년과 1607년 각각 탐적사(探賊使)와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통신사 교류의 시작을 연다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로 이에 답했던 일본에서는 이후 <조선정벌군기강>, <에혼 다이코기등의 문헌에서 조선통신사는 조선이 일본에 복속되어 조공을 바치러 온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서술한다.

 

그러나 나는 이번 답사에서 조선 통신사 선현이 남긴 시문과 필적 그리고 그들을 접대했던 각 사적지(史跡地)와 관련 인물들의 연구를 통해 그러한 주장이 사실과 다름을 알 수 있었다융숭한 사신의 대접을 받으며 성신교린(誠信交隣)의 정신으로 양국의 평화 유지에 힘쓴 조선통신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일본은 당대 최고 권력자였던 쇼군만이 지날 수 있었던 오미하치만 비와 호 부근의 길을 조선통신사에게만 허용하였다그 길에 조선인가도(朝鮮人街道)라는 이름을 붙인 것만 보아도 조선이 일본과 동등한 관계 이상의 자격으로 통신사를 파견하였다는 사실은 명백해진다향후 한·일 양국의 우호적 친선 교류의 지속과 건전한 역사관의 확립을 위해서는 이러한 사항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나는 일본 측 조선통신사 유네스코 등재 추진 위원으로 활동 중인 교토조형예술대학의 나카오 히로시 교수에게 이에 대한 유네스코 등재 위원회의 공식 입장에 관해 물었다그는 '조선이 일본과 동등한 자격으로 통신사를 파견하였다고 유네스코에 등재할 것'이라는 답변을 들려주었다.

세이켄지(淸見寺)의 오호죠(大方丈)에 조선 통신사 남용익과 남성중 부자(父子)의 시문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우리 답사단은 시즈오카에 머물며 국지정사적(國指定史跡)으로 지정된 세이켄지(淸見寺)에 방문했다나는 그곳의 본당 오호죠(大方丈)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부자간의 애틋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1711년 제8차 통신사로 세이켄지를 방문한 47세의 남성주는, 56년 전 제6차 통신사로 동일한 장소에 방문했던 당시 28세의 아버지가 남긴 시문(詩文) ‘밤에 세이켄지를 지나며를 발견하고 이에 차운한 시를 남긴다남성주의 시 세이켄지에서 남긴 시운을 울며 따라 짓다는 다음과 같다.

막부에 올린 이름 선현에 부끄러운데 아비의 옛 자취를 남긴 시에서 되찾았네 안덕사에서 남은 생애 다하지 못해 오산 해 저무는 하늘 향해 눈물 뿌리네 // 아버지께 행차 머무시는 곳 어린 자식도 구슬 신 신고 지나는데 다만 시편만 남아 있어 슬피 읊조리니 감회가 많네 // 특별히 상서로운 연기는 삼신산과 흡사하여제천의 상서로운 비 만다라 꽃이 되어 날리는데 이끼 낀 옛 탑을 손으로 만지나니 선친께서 남긴 이름 몇 층에 있는고". (번역문 인용조선통신사 옛길을 따라서3, 한울, ()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 엮음, 2009)

 

당해 연도그의 부친이 세상을 떠난 지 20여 년이 되는 해였다마지막 조선통신사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지금나는 남성주가 세이켄지에서 떠올린 그것과 유사한 감정을 느낀다일본의 역사 왜곡과 위안부 사죄 문제 그리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에 대한 논란이 뜨거운 지금,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방문하는 것이 과연 임진왜란과 일제의 식민 지배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낸 우리 선현에 부끄럽지 않은 행동인가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옛 조선통신사의 발자취를 따라 그들이 남긴 유려한 문장과 필담을 통해 그들이 지나온 길을 반추해 본다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이자 도적의 땅에 들어가 동포를 쇄환(刷還)해오고 조선 내 평화를 위해 교린의 화의를 맺었던 조상들의 복잡다난(複雜多難)했을 속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본다.

도모노우라 후쿠젠지(福禅寺)에서 종사관 이방언이 일동제일형승(日東第一形勝)이라 쓴 글을 목각편액으로 만들어 객실에 장식하였다

그리고 도모노우라 후쿠젠지(福禅寺)에서 종사관 이방언이 일동제일형승(日東第一形勝)이라 명명한 가슴 시원하게 확 트인 경치를 바라보며그들이 16개의 눈으로 그랬던 것처럼 60개의 조선통신사의 눈으로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치열한 고민을 하고 대국적(大局的혜안을 길러보는 것이다.

 

우리는 통신사와 일본국왕사를 통해 이룩된 조선과 일본의 우호적 교린 관계가 어떻게 어긋나게 되었는지 잊어서는 안 된다또한, 이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성찰해야 할 것이다·일 양국이 조선통신사 문화 사업을 계기로 선조들로부터 상호 믿음과 우호적 교린에 대한 지혜를 얻고 올바른 역사관을 공유하는데 협력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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