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13일 청년 신 조선통신사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부산에서 만나 시모노세키로, 히로시마를 거쳐 오사카로, 시즈오카를 거쳐 도쿄에 도착했다. 아메노모리 호슈 기념관에서는 주사위를 몇 번 던지면 금방 부산에서 도쿄까지 도착했지만, 실제로는 생각보다 힘든 일정이었다. 과거의 조선통신사는 얼마나 힘들었는지 예상이 잘 되지 않는다.
8박 9일동안 청년 신 조선통신사를 통해 일본을 돌아다니며 많은 경험을 했지만 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히로시마에서의 일이다.
첫번째로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에 방문했다.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little boy’라는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해당 사건은 최초의 핵무기가 투입된 사례로 약 14만 명의 사망자를 낳았다고 한다. 특히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자인 이우 등 한국인 약 2만명이 해당 사건으로 사망하였다. 즉사뿐만 아니라 피폭으로 인한 피해도 엄청나다. 원폭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 또한 심한 화상을 입거나 신체 중 일부분을 훼손한 상태가 되었다. 대부분 이른 시일에 사망하거나, 장애를 겪으며 남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 가장 기억나는 건 검은 비를 마시는 사람들이다. 폭탄이 떨어진 이후 남은 방사선 분진이 검은 비가 되어 내렸지만, 타는 듯한 갈증에 사람들은 입을 벌리고 빗물을 마신다. 참혹한 현장의 사진들을 보고 어떤 관객은 애도를 표하고, 어떤 관객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전쟁은 항상 희생자를 낳는다. 승자와 패자가 나뉘지만 양측 모두 많은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다. 승자인 미국도 진주만에서의 피해를, 패자인 일본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피해를 입었다.
승자와 패자의 구분이 무색하기도 하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은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고, 과연 어떠한 미래를 지향해야 할지 생각하게 만든다. 히로시마의 과거와 같은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될 것이다.
두번째로 오코노미야끼다.
주 히로시마 총영사관에서 청년 신 조선통신사를 위해 오코노미야끼를 사주셨다. 오코노미야끼는 크게 히로시마풍과 오사카풍으로 나눌 수 있으며, 서로가 원조임을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히로시마풍은 면과 함께 각각의 재료가 층을 쌓듯이 겹겹이 쌓이는 것이 특징이며, 오사카풍은 면이 들어가지 않고 각각의 재료가 서로 섞이는 것이 특징이다. 주 히로시마 총영사관 임시흥 총영사님은 오코노미야끼의 소스의 원조인 ‘오타후쿠’가 히로시마 기반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오코노미야끼의 원조는 히로시마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개인적인 입맛으로는 오사카풍이 더 맛있는 것 같지만, 그 날의 환대와 추억을 기억하며 머리 속에서는 ‘오코노미야끼=히로시마’로 외워버렸다.
길면 길었고 짧으면 짧았다고 말할 수 있는 8박 9일은 어느새 지나갔다.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 많이 배울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과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 기뻤다. 첫날에는 ‘괜히 왔나?’라는 생각도 들었으나, 어느새 마지막날이 되니 ‘오길 잘했다.’라고 생각이 바뀌었던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