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승완 참가자 블로그 후기 中
12회 동안 이어진 조선통신사의 사행길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일들의 연속이었어요. 여정은 고되지, 말은 안 통하지, 그렇다고 왕명을 어길 수 없어 가지 않을 수도 없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호랑이 굴에 직접 들어가는데 정신도 바짝 차렸어야 했으니, 신경도 엄청 쓰였을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현대 외교에서도 참고할 만한 사례들이 가득하다고 느꼈어요. 201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될 정도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료들이 한국과 일본에 많이 남아있으니, 앞으로도 양국의 관계를 이해하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도모하기 위해 통신사와 관련된 연구가 지속되었으면 좋겠어요.
전 세계를 휩쓸던 코로나라는 역병이 잠잠해진 뒤에 대학생을 대상으로 선발하던 신조선통신사를 만 20세에서 35세 사이의 청년으로 범위를 확대하면서 그 혜택을 누리는 첫 수혜자가 되는 영광을 누렸어요. 대학교를 칼같이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하여 산업역군으로 거듭나는 것만이 미덕인 줄 알았던 구시대의 사람이라 20대라는 꽃다운 나이에만 누릴 수 있는 대외활동의 기회를 전혀 살리지 못했던 한을 33살이 되어서 풀어버릴 수 있었어요. 나이가 제법 있는지라 어린 학생들과 어울릴 수 있을지 한편으로 걱정도 했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어요. 일본과 역사에 관심이 많은 열정적인 학생들 중에 선발된 친화력이 좋은 인재들이라 대부분이 20대 초중반인 푸릇푸릇한 무리들 속에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저를 어색함 없이 녹아들 수 있도록 많이 배려를 해주었어요. 다양한 재능을 가진 어린 친구들과 8박 9일 동안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오히려 나이를 먹은 제가 많이 배웠어요. 일본에서 의사로 일하려고 일본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하면서 일본 문화에 빠삭한데도 실력을 늘리기 위해 버스 안에서도 한자 공부를 하는 친구, 나보다 경험은 적어도 인간관계에 통달해서 복잡한 사회생활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보고 배울 점이 많았던 친구, 긴 여행길에 필요가 없어진 짐을 미련 없이 줄이면서 버림의 미학을 알려준 센스 넘치는 친구 등.
누구보다 배울 점이 많았던 분은 교단에서 은퇴하시고 일흔이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저희를 열정적으로 지도해 주신 손승철 교수님이에요. 8박 9일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내내 현장과 버스를 가리지 않고 평생을 다 바쳐 연구한 지식의 결정체를 현장에서 국립대 교수님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전달해 주셨어요. 덥고 습하기로 악명 높은 일본의 여름 날씨를 뚫고 조선통신사의 모든 것을 전수해 주신 교수님께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조선통신사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손승철 교수님께서 지으신 "조선 통신사의 길 위에서"라는 책을 한번 읽어보시길 추천드려요.
하지만, 이번 여정에서 가장 제대로 배운 것은 일본이라는 나라 그 자체에요. 이전에도 일본을 여러 번 다녀왔지만, 이번만큼 일본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느낀 적이 없었어요. 가깝고도 먼 나라, 비슷하지만 정말 다른 나라, 밉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나라. 일본이라는 나라는 엄청 큰 나라에요.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말이죠. 8박 9일 동안 버스, 신칸센을 이용해서 열심히 달렸는데도 혼슈를 겨우 가로지를 수 있을 여정일 정도로 굉장히 넓고 긴 나라였어요. 두 발로 직접 일본의 지방 소도시부터 대도시와 수도까지 누벼보니, 편평한 땅이라면 모든 게 질서정연하게 가득 채워져 있었어요. 경기 불황이라고 잃어버린 30년이라고는 해도 이미 30년 전부터 이런 사회적인 인프라들을 구축했다는 게 오히려 이 나라가 가진 잠재력을 체감할 수 있었어요. 카메라와 사진이라는 사각형 틀에 전부 담기 힘들 정도의 규모라 직접 눈으로 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비록 껄끄러운 욕심 때문에 주변 나라를 침략하고 잔혹한 행동의 말로는 핵이라는 비참한 엔딩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근대화를 이루고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야망과 힘 자체는 결코 무시할 수 없고 무시 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고, 일부 영역에서는 일본을 뛰어넘을 정도로 부강해졌어도, 여정에서 직접 느낀 일본은 여전히 따라잡으려면 갈 길이 먼 곳이었어요.
(이한상 정무공사 참사관의 특강)
주일본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근무하시는 이한상 정무공사 참사관의 특강에서 가장 뇌리에 깊숙이 박혔던 것은 딱 한마디였어요.
"일본이 한국을 다시 침략하는 것을 가장 경계한다."
최고이자 최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한·일 외교의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계신 외교관의 입에서 직접 들은 한마디는 저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어요. 역사적으로 일본은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기처럼 우리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지는 틈을 타 대륙 진출을 구실로 침략을 감행했어요.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 이후로 지금까지는 나름 평화를 유지하고 있지만, 역사는 언제나 반복되는 것이기에 일본이 호시탐탐 외연으로의 확장 기회를 엿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요. 일본이라는 국가가 가진 잠재력 또한 경제, 기술적으로 여전히 충분하다고 생각하구요.
국제 사회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어요.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면서 일본의 영향력이 약해지니, 이제는 중국이 급부상하더니 초강대국인 미국의 턱 끝까지 치고 올라와 태평양으로의 진출 야욕을 숨기지 않고 있어요. 과거에는 일본이 역사를 왜곡하고 독도로 영토 시비를 걸어왔다면, 현재는 중국이 역사를 왜곡하고 한복과 김치 같은 문화 시비를 걸고 있어요. 그만큼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지정학적 위치 상 우리나라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끊임없이 도전해올 것이라 예상해요. 우리는 나라를 빼앗기는 굴욕적인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내면의 힘을 키워 다시는 넘볼 수 없는 국가를 만들고, 외적으로는 험난한 국제 정세의 파도 속에서 우리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 파트너를 현명하게 선택하여 공동으로 대응해 나가야만 해요.
현시점에서는 누구와 손을 잡아야 할지 점점 명확해지고 있어요. 전란이 끝나고 불구대천의 원수 국가와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만에 서로의 사절단이 왕래할 수 있도록 결단을 내렸던 우리 선조들처럼,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평화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내려 먼 훗날 후손들에게 부끄러움이 없도록 해야 할 거예요. 그 해답을 찾는 중요한 키워드가 바로 "조선통신사" 일 것이라 감히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