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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후기

이현배 (충북대 행정학과)

와니우라(鰐浦). 신(新)조선통신사가 부산을 출발해 대마도(쓰시마섬)에 도착해 처음 들른 곳이다. 통신사는 아니었지만 역관사로 일본에 온 선조들이 이 곳 와니우라(鰐浦)에서 풍랑을 맞아 전원 익사했다. 우리 선조들이 외교 임무를 하던 도중 이렇게 안타깝게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에 가슴 아팠다. 유쾌하고 즐거움으로 가득 찰 것만 같았던 신(新)조선통신사 탐방은 와니우라(鰐浦)의 조선역관사순난비 앞에서 이렇게 시작된다.

일본 방문이 처음이었던 나는 이번 신(新)조선통신사를 큰 기회라고 여겼다. 한·일 관계 특히 근현대사의 역사적 사실을 직접 체험하고 나 스스로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다큐멘터리와 책을 통해 많은 사실을 접했지만 경험은 전무후무했다. 지역의 교육봉사단체인 성암야간학교에서 고등국사 선생님으로 수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은 내게 일본과 관련하여 근현대사에 많은 관심을 갖고 질문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삶의 조건은 역사라는 과거의 사실로부터 기원한다. 특히 풍랑과 격동, 질풍노도와 질곡으로 점철된 근현대사를 아는 것은 대학생으로서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번 신(新)조선통신사를 통해 내가 원했던 목적은 한·일 관계를 근현대사 중심으로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조선통신사(1607~1811년)는 임진왜란(1592년) 이후 전쟁으로 인해 단절되었던 한·일 관계가 다시 이어지는 계기였으며 약 200년의 평화를 상징하는 외교사절단이었다. 비록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일제의 식민지배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평화와 한·일 관계를 위해서 신(新)조선통신사는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걷는 길이 단순히 조선통신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생각거리도 제시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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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선조들의 비참한 모습을 깨닫게 한 귀무덤. 전쟁에서 평화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 조선통신사의 의미를 되새겼다.

이번 탐방이 조선통신사의 발자취를 따라 선조들의 숨결을 느껴보는 것이기에 생생한 역사 현장에서 그들의 생각에 공감할 수 있어 매우 뜻깊었다. 단순히 우리 선조들을 따라갔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함께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그렇기에 즐겁고 행복한 감정 속에서 슬프기도 했고 가슴 아프기도 했다.

근현대사의 비극인 덕혜옹주의 삶을 대마도 이즈하라(嚴原)의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에서 느낄 수 있었다. 역사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덕혜옹주의 비극적 삶에 나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최익현 선생이 의병 운동을 하다 붙잡혀 이곳 대마도에서 운명하셨는데 타국에서 순국한 그 모습을 상상하니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조선통신사로 인해 평화의 시대가 열리기 전 한·일 양국은 임진왜란(1592년)을 경험했다. 그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臣秀吉)라는 야욕을 가진 사람 때문이었다. 그가 지은 오사카(大阪)성을 방문하고 그의 아들이 자결한 장소에 세워진 묘비를 보면서 전쟁이라는 반인륜적인 사건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러한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 것을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인류사에서 전쟁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주제이다. 그것은 전쟁이 매우 많이 발생했고(끊이질 않았고) 전쟁으로 인해 역사의 나침반이 크게 바뀌었다. 그렇다고 약육강식이 국제질서이며 전쟁이 당연하다는 논리가 옳은 것은 아니다. 힘도 없이 평화만 부르짖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겠지만 전쟁을 정당화하고 중시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 동아시아는 전통적으로 유교 문화 속에서 인(仁)과 예(禮)를 중시하고 전쟁보다는 공존과 평화를 지향했다. 우리 선조 또한 그랬다. 조선통신사는 이러한 움직임의 연장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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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선통신사 일행들과 함께 옛 조선통신사 선조들의 자취가 있는 곳을 따라가며 의미를 되새기는 모습.

200년 동안 지속된 평화 속에서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 사람들은 매우 당황하고 어쩔 줄 몰랐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臣秀吉)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진 귀(코)무덤(耳塚; 鼻塚)은 선조들의 당황함을 넘어서 비참한 역사적 현장을 담은 쓰라린 유적이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비참하게 죽은 우리 선조들 앞에서 또다시 눈물을 흘리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지막 조선통신사(12차, 1811년)를 끝으로 한·일 양국의 우호적 평화 관계는 끝이 난다. 청·일 전쟁(1895년)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淸)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다. 시모노세키의 일청(日淸)강화기념관에는 청(淸)과 일본이 우리나라를 두고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조약을 체결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나는 답답함과 분개라는 감정에 억울함과 비참함을 느꼈다. 우리의 삶의 조건을 우리가 아닌 타국이 결정하다니!

히로시마 평화공원에서도 우리 선조들의 아픔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인 피폭자 위령비에서 우리는 헌화했다. 일본에 강제로 끌려와 원폭 피해를 입은 우리 선조들이 안타까웠다. 국적을 떠나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원폭 피해를 입은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다. 히로시마 평화공원에서 일본은 자신들도 피해자임을 표현하고 있었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군국주의 속에서 결국 그들 또한 피해를 입고 비참한 결말을 맞는다.

평화는 아름답다. 그러나 평화는 쉽지 않다. 나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 전쟁이 아님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힘이 없는 평화는 위험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도 평화를 위해 최소한의 힘을 키울 수 있어야 하며 그 속에서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평화는 상대방과 서로 통해야 이룰 수 있기에 우호를 다지는 것과 동시에 상대방의 모습도 올바로 보아야 한다고 느꼈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으로 갔던 김성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臣秀吉)가 조선을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했고 그로 인해 조선의 전쟁 준비는 더욱 느슨해졌다.

상대방이 적(敵)으로 변하는 순간 지피지기 백전불태 (知彼知己 百戰不殆)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무시하거나 방심하는 순간 왜곡된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신(新)조선통신사 탐방은 일본을 새롭게 바라보고 일본에 대한 우호와 긴장을 느끼게 해준 귀중한 체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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