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동욱 (한림대 체육학과)
지난여름 한 분식집에서의 일이다. “여기 오뎅 하나 주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옆에 있던 친구는 왜 일본어를 쓰냐며 나를 꾸짖었다. 일본어는 어떻고 중국어는 어떠랴, 본인한테 익숙한 언어를 쓰면 되는 것 아니냐는 나의 반박에 친구는 “영어, 중국어는 다 되는데 일본어는 안 돼”라고 받아쳤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혐일(嫌日) 광경은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한일전 축구 경기라도 하는 날이면 ‘숙명의 라이벌전’이라며 전국이 떠들썩하다. 라이벌이라는 말은 양쪽이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동등한 적대심을 가져야 성립된다. 불현듯 일본도 우리처럼 이웃나라에 대해 라이벌로 여기는지 궁금증이 들었다. 과거 일본으로 건너갔던 조선의 외교 사절 조선통신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제3회 대학생 新조선통신사’는 이런 나의 궁금증을 꽤 해소해줬다.
많은 이들이 조선 땅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임진왜란과 35년간 식민통치의 치욕은 잘 새기고 있지만, 양국 외교의 물꼬를 텄던 조선통신사에 대해선 대체로 문외한이다. 15세기부터 양국은 신의(信義)를 통하여 교류하자는 의미로 통신사(通信使)와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는 외교 사절단을 각각 서로에게 파견했다. 통신사는 1429년을 시작으로 임란 전후에 각각 4회, 12회 파견됐다. 300~500여 명으로 구성된 조선통신사는 1년 가까이 되는 여정 속에서 일본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을 수행하고 '성신교린'을 위해 평생을 바친 아메노모리 호슈.
히코네 번에서 통신사를 접대하기 위해 들였던 돈은 은 백만 냥. 현재 가치로 2000억 원에 육박하는 거액이다. “통신사가 2년 연속으로 온다면 번은 망할 것”이라는 말이 통용됐을 정도다. 통신사 삼사가 묵었던 절 소안지에서는 꿩고기를 산처럼 쌓아놓고 접대했고, 숟가락을 쓰지 않는 일본이지만 통신사가 올 때는 특별히 제작해 대접했다고 한다. 조선인가도(朝鮮人街道)는 현지인들이 통신사가 지나간 길이라는 의미에서 직접 붙인 이름이다. 일본 땅에 남겨진 통신사의 유적은 당시 조선과의 외교에 대해 중요하게 여겼을 일본의 태도를 증언한다. 폭넓은 국제적 안목으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펴낸 신숙주는 운명 직전 성종에게 “원컨대 일본과의 화친을 끊지 마시옵소서.”라는 유언을 남겼다. 조선통신사로 첫 교류를 시작한 두 나라는 이후로 전례 없는 평화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다.
매년 증가하는 일본 관광객을 미루어볼 때 일본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많이 변한 것 같다. 반면 시계추같이 오락가락하던 양국의 외교 관계는 반대로 역행하고 있다. 대마도 반쇼인에서 들었던 강의 내용 중 ‘문화상대주의’에 대한 설명이 기억에 남는다. 전 세계의 수많은 나라는 각각의 개성 있는 문화를 갖고 있다. 문화상대주의는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견해를 일컫는다.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무턱대고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는 터. 외교는 아마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일찍이 자본화된 일본은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물질적으로 표현하는 문화가 자리 잡혔다. 금전적 보상이 우선시 된 제안은 우리 시각에서 이해하기 힘들 수 있겠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최선의 표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新조선통신사’의 기회가 없었다면 내가 갖고 있던 편견은 지금도 여전했을 것이다. 상대에 대한 올바른 인지는 비로소 나를 우물 안에서 꺼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