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사이 역사박물관의 외관]
통신사가 나고야에서 아이치현으로 들어가려면 세 개의 강을 건너야 했다. 그 중 세 번째 강이 통신사가 건너야 했던 기소가와 강(木曾川)이다. 1719년 통신사 재술관 신유한은 세 개의 강을 건너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일찍이 출발하여 세 개의 큰다리를 건넜다. 첫째는 은고(殷股)요. 둘째는 계천(界川)이요, 셋째는 기천(起川)이니 모두 물 위에 배를 가로 놓고 큰 줄과 철쇄(鐵鎖)를 가지고 좌우로 얽어맸고, 그 위에 판자를 깔고 양쪽 머리에는 각각 아름드리 나무를 세워서 맸다. 이와 같은 것이 셋이었는데 기천(起川)이 가장 커서 배 3백 척을 연결하여 길이가 천여 보이니, 공력과 비용을 상상할 만하다. 두 언덕의 관광하는 남녀는 낭화강(浪華江)과 같았는데, 가마를 타고 발(簾)을 드리우고 온 자는 귀족들의 부녀라 한다(9월 16일).
[미니어처로 재현된 배다리의 모습]
인근에 이치노미야시(一宮市) 비사이(尾西) 역사민속박물관이 있는데, 그곳에는 배다리에 관한 여러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자료관의 학예사는 "기소가와 강은 강폭이 1km에 달했는데, 강물 위에 어선을 옆으로 띄워 고정시키고, 그 위에 판자를 깔아 배다리를 만들었다. 배가 275척에 배 위에 까는 판자가 3,360장으로 배다리는 총길이 855m, 폭 2.7m 규모였다. 배다리는 쇠닻과 돌닻을 이용하여 밧줄로 단단히 고정시켰다."고 설명했다.
자료 옆 설명문에는 '쇼군, 조선통신사, 8대 쇼군 요시무네(吉宗)의 생모의 통행을 위해 배다리를 놓았다. 길이 855m라고 하는 일본 최대의 배다리이다. 1748년 조선통신사가 왔을 때는 인원 7578명, 대소 277척의 배를 인근 마을에서 모집하여 가설과 철거 작업을 했다. 이 해 2월 19일부터 가설작업을 시작하여 5월 16일에 완료했고, 6월 16일 일행이 통과한 후에 7월 4일 철거했다.'는 안내문이 쓰여 있었다. 한 번의 통행을 위해 약 4개월 반을 공사하여 설치했고, 통과 후에는 철거했으며, 돌아갈 때 다시 설치했다.
270-80척의 배를 일렬로 하여 쇠사슬이나 굵은 밧줄로 연결한 뒤에 강 양안에 거대한 통나무를 박아서 지탱하는 구조이다. 또 상류에는 물줄기를 완만하게 하기 위한 목책이 설치되고, 자재의 조달에 필요했던 노역은 감히 짐작할 수 없다. 모든 과정은 인근 마을에 명령해서 작업을 시켰던 것이다. 1711년 통신사가 왔을 때는 일꾼 33만명, 역마 7만 7천 필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통신사의 에도 왕복을 위해 몇 개의 강을 건너는 동안 이러한 배다리가 4개나 놓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