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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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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에 관심이 없었던 내가 유일하게 응원하는 경기는 바로 한일전이었다.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등 일본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역사를 배웠기 때문에 현재의 우리는 일본을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교에 와서 일본사에 대한 강의를 듣고 2016년에 한일 대학생 포럼에 참가하면서 한국과 일본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고, 2018년 제4회 대학생 신조선통신사에 참가하면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4회 대학생 신조선통신사는 과거에 조선통신사가 한양에서 출발하여 막부의 쇼군이 지내고 있는 에도까지 이르렀던 길을 따라 89일 동안 진행되었다. 돌아올 때는 도쿄에서 바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9개월이 걸렸던 통신사의 여정을 모두 살펴보아야 했기 때문에 일정이 다소 힘들기도 했다. 특히 장마가 시작되는 더운 여름에 다녀오느라 지치기도 했으나, 최소 300년을 숨 쉬고 있는 조선통신사의 유물을 볼 땐 에어컨과 선풍기도 없이 왕래했을 선조들이 떠올라 힘든 것을 견딜 수 있었다.

탐방을 하면서 가장 신기했던 것은 일본 측에 남아있던 조선통신사의 유물들이 매우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과거의 조선인 차별이나 최근의 한일관계가 좋지 않은 것을 생각해보았을 때 조선통신사에 대한 기억이 소홀해질 수도 있을 텐데, 아카마 신궁, 후쿠젠지, 세이켄지 등등 우리가 방문했던 장소에서는 지금까지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을 뿐 아니라 흔쾌히 우리에게 꺼내 보이며 직접 설명도 해주셨다. 모두 한결같이 조선통신사 덕분에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평화롭고 우호적이었음을 강조하셨다. 조선통신사에 대한 기록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이러한 노력 덕분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답사지에서 기분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재일한인역사자료관에서 본 재일동포의 역사와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서 본 가슴 아픈 역사로 인해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였다. 특히 히로시마에서 전시를 볼 때에는 조선인 피해자도 많은데 일본인의 피해만 전시하는 것 같아서 더욱 불편했다. 그러나 그곳에 계시던 자원봉사자께서 히로시마의 원폭 돔을 보전한 이유를 설명해주시면서 우리나라의 군대가 여러분의 나라에게 몹쓸 짓을 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그 불편함이 다소 사라지면서 어쩌면 히로시마의 진정한 평화는 피해사실을 과시하기보단 가해사실도 인정하고 사과할 때 비로소 찾아오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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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의 자원봉사자가 유물 해설을 해주고 있다. 

 

조선 후기에 조선통신사는 정유재란이 끝난 지 10년 만에 다시 재개되어 12차례 조선과 일본 사이를 왕래하였다. 우리나라가 해방 후 일본과 다시 수교를 하게 된 것보다 훨씬 짧은 시간이 걸린 것으로 그 의미가 매우 깊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통신사가 일본에서 지낼 때의 비용은 모두 일본 막부가 부담했는데 그 비용이 막부의 1년 예산과 맞먹을 정도로 컸으나, 통신사가 오지 말았으면 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세이켄지의 종루에는 1643년에 통신사 일원으로 방문했던 박안기가 남겼던 글씨가 현판으로 남아있다. 경요세계(瓊瑤世界)는 표면적으로 세이켄지의 풍경을 찬미하는 뜻이기도 하나, 함축적으로 보았을 때 조선과 일본이라는 두 아름다운 옥이 만나 화합을 이룬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조선통신사가 남겼던 기록을 보면 한시나 화법, 마상재 등의 문물을 전해주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반대로 일본으로부터 배워 바람직한 것을 남긴 기록도 있다. 우리는 한국과 일본이 서로를 견제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힘을 합쳐 발전을 도모하는 이웃국가가 될 수 있음을 조선통신사의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을 앞두고 있는 21세기의 후손들에게 조선통신사가 남기고 싶은 메시지는 바로 경요세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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