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라는 단어 자체에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간혹 스포츠 경기에 '한일전'이라는 타이틀이 붙으면 그 어느 때보다 승리에 집착했다. '대학생 新조선통신사' 여정을 떠나기 전의 일본에 대한 나의 인식은 그러했다. 여정을 떠나면서도 그러한 인식들을 전혀 버리지 못했었다. 대마도에 도착하여 통신사의 첫 발걸음을 내딛을 때엔 '독도'가 연상되며 여러 한일 문제에 대한 생각들로 머리가 가득 찼다. 그러던 와중에 내 눈에 들어온 한 선술집 앞 부착물의 내용은 일본에 대한 나의 태도를 더욱 부정적으로 만들었다.
한국인은 출입할 수 없다는 문구를 읽고 나는 엄청난 거부감을 느꼈다.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일본 사람들도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들로 가득할 것만 같았다. 일본이 마치 적(敵)처럼 느껴졌고, 나 스스로는 1604년 적(敵)으로서의 일본을 탐사하러 나선 탐적사(探賊使)가 된 것만 같았다. 이러한 감정은 남은 9일간의 여정에서도 이어질 것처럼 보였다.
생각의 전환의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은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였다.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는 에도 중기의 유학자로, 한국과 일본의 다리 역할을 했던 한·일 관계에 매우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당대의 많은 일본인들과 달리 그는 조선의 독자적인 문화와 풍습, 습관과 취미, 기호가 있고 이를 존중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한국과 일본의 것 중 뭐가 더 나은 것은 없으며 다만 한국인에게는 한국의 것이, 일본인에게는 일본의 것이 더욱 잘 맞는다는 그의 기술들을 통해 그가 얼마나 열린 사고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 같은 그의 사상을 공부하면서, 무작정 일본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기 보다는 열린 마음으로 그들을 이해해보려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사카의 간사이대학(関西大学) 학생들과의 교류회는 일본에 대한 마음의 벽을 완전히 허물었다. 적대적으로만 느껴졌던 일본의 학생들은 짧은 시간 만에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일본어를 할 수 없는 나를 위해 그들은 서툰 한국어와 손짓·몸짓을 동원해가며 소통하려했고 그런 그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교류회의 여러 과제들을 훌륭하게 수행해 낼 수 있었다. '우리는 이제 친구'라며 연락처를 건네주었던 그들에게 나의 적대감은 완전히 '무장해제' 당하였고, 그들을 내 첫 일본인 친구들로 생각하게 되었다.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가득 안고 대마도에 발을 내딛었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9박 10일간의 新조선통신사 여정은 나에게 있어 마냥 적으로만 느껴졌던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허물고 그들에 대한 이해의 기반을 닦을 수 있던 시간이었다.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가 주장했던 성신교린(誠信交隣), 즉 '서로 속이거나 다투지 않고 진심을 가지고 이웃을 대해야 한다'는 정신을 완전히 실천은 못했겠지만 적어도 여정을 통해 나는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일본을 대하는 자세는 배워왔다고 자부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의 과거 갈등사, 그중에서도 '위안부 합의' 문제가 요즘 더욱 많은 조명을 받고 있다. 최근 위안부 합의에 관련하여 1mm도 움직일 수 없다는 日 관방장관의 발언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 '침략의 관계'로서의 일본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한 강경한 자세에 우리 국민이 어찌 우호적인 태도를 지닐 수 있을까. 지금은 과거 조선통신사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분쟁(紛爭)의 관계를 공생(共生)의 관계로 바꾸어야 할 때이다. 이 때, 과거에 대한 진심어린 사죄와 양국이 서로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지니는 것은 반드시 선행되어야하는 절차일 것이다. '서로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아야 한다'는 성신(誠信)의 정신이 더욱 중요해지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