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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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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 (동국대 철학과)

 

여말선초(麗末鮮初) 시기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 현안은 왜구의 약탈 문제였다. 조선 전기 네 차례에 걸쳐 에도(江戶, 일본 도쿄의 옛 이름)에 방문했던 조선통신사는 대화를 통해, 약탈의 시대를 공존의 시대로 이끌었다. 왜란 직후의 현안은 조선인 포로 송환 문제였다. 16차례에 걸친 통신사 행렬이 풀어내어야만 했던 문제들은 언제나 첨예하게 얽혀 있었다. 왜구의 수탈,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침략으로 한반도 정치-경제체제는 흔들렸고 민중의 삶은 파괴당했다. 몇 마디 말과 글로 치유될 상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당대 조선 조정과 도쿠가와 막부는 상호 평화의 시대를 200년간 유지했다.

 

양국은 경제적 문제군사적 긴장 해소라는 실리를 이유로 통신(通信)을 이루어 낸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한일관계를 회복해야하는 이유와 꼭 겹쳐진다. '3회 대학생 신()조선통신사-통신사의 길을 따라서프로그램 막바지에 들었던 강연에서 니시노 준야 교수가 제시한 통계자료가 이를 뒷받침한다. 20171226일 오전 한국문화원에서 진행된 강연에서 지한파 학자인 니시노 교수는 동아시아연구원(EAI)言論NPO가 발표한 5회 한일 국민상호인식조사결과를 소개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일관계를 중요하다고 응답한 한국인은 89.9%로 열 명 중 아홉 명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일본인도 64.3%가 중요하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한국인과 일본인 모두 자국과 가장 중요한 관계의 국가를 묻는 질문에서는 상대국을 답한 응답률이 각각 3.6%, 2.6%로 낮은 수치를 보였. 흥미로운 것은 경제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중요한 국가를 묻는 질문에서는 한국인 35.7%, 일본인 23.3%가 상대국을 꼽았다.” 특히 일본인 중 절반 이상이 한국의 경제발전이 좋은 영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응답하였다.” 같은 조사에서 한일관계 발전을 위해서 양국 국민은 영토(독도), 역사 인식(일본군 성노예-위안부)문제 해결할 필요성에 공감했다.(자세한 내용은 http://www.eai.or.kr 참조)

일련의 조사결과를 소개한 뒤 니시노 교수는 개인적 견해임을 전제로 현재 일본 내 혐한 감정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문재인 정부가 20151228일 이루어졌던 협의에 대한 의견을 밝히는 일을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한일관계는 한동안 소강상태에 접어들 것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간차원의 교류에 주목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조선통신사를 대상으로 오사카 간사이대학에서 진행된 나카오 히로시 교수의 강연(2017.12.21)에서도 민간 주도의 상호 교류의 중요성은 강조되었다. 나카오 교수는 조선통신사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양국 정부가 아닌 민간단체(한국의 부산문화재단, 일본의 조선통신사연지연락협의회 등)가 주도하였기에 가능했다고 역설했다. 양국 정부가 주도했다면, 현안의 첨예한 갈등은 조선통신사 세계기록유산 등재 과정에서 이루어진 합의에 장애물로 작용했을 것이다.

두 차례의 강연을 듣고, 나는 한일관계의 회복은 민간 주도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 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세대의 민간교류는 이미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우리는 원나블(원피스, 나루토, 블리치)’로 대표되는 일본의 소년만화를 읽으며 우정의 의미를 배웠다. 이 과정에서 일본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반대로 최근의 일본 청년층에서 나타나는 한국 아이돌 팬덤 현상과 반한 정서는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니시노 교수는 한일 국민의 정서에 세대 분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일련의 민간 중심의 문화 교류는 역사적 화해의 과정이라고 볼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의도적 외면 혹은 물리적 시간이 낳은 망각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진정한 역사화해- 한일관계 회복으로 이어질 수 없다. 진정한 역사화해는 시간의 흐름이 가져올 망각을 통해 이루어질 수 없다.

 

히로시마 평화공원에는 수없이 많은 국적의 외국인 관광객들이 있었다. 신조선통신사가 답사한 유적지 중에서 외국인 관광객으로 붐비는 곳은 히로시마평화공원이 유일했다. 짐작컨대 그들 중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으로 참전했던 나라의 국민들도 보였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리틀 보이를 그들은, 또 피폭 1세대 히로시마 시의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건물의 잔해와 골격이 남아있는 원폭돔과 종이학 소녀(사사키 사다코)상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원폭돔(原爆)1915년에 지어진 히로시마 시의 상업전시관이었다. 194586일 미군이 투하한 원폭으로 인해 반파된 건물(잔해)이다.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미국은 원폭돔의 세계유산 등록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결국 조사보고서의 세계에서 처음 사용된 핵병기라는 문구는 지워진 채 등록되었다. 공원에 세워진 종이학을 들고 있는 소녀상은 19452살이었던 사사키 사다코가 백혈병으로 12살에 죽기까지 이야기를 상징하는 동상이다. 히로시마 시에서는 매년 86일 핵무기 사용에 반대하는 평화 선언을 하는데 2017년 선언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72년 전 오늘 86815분 히로시마 하늘에 "절대악"이 발사되고 피어오른 버섯 구름 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떠올려보지 않으시겠습니까. …… 무시무시한 방사선과 열선. 쿵 하는 땅 울림과 폭풍. …… 바로 지옥입니다. ‘절대악인 원자 폭탄은 버섯 구름 밑에서 죄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비참한 죽음을 낳았을 뿐 아니라 방사선 장애나 건강 불안 등 심신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사회적 차별과 편견을 일으켰고,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의 인생을 크게 왜곡하고 말았습니다.” 20171227일 한일위안부 합의 검토 TF(태스크포스)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합의에 국내외 소녀상 관련 '비공개 부분'이 있었다. 주한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의 이전을 이면 합의한 것이다. 원폭돔과 사사키 사다코의 소녀상은 절대악의 흔적이 물리적으로 사라지는 것을 막고, ‘평화의 교훈을 후세에 물려주고자 히로시마에 있다. 일본 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은 여성을 대상화했던 성노예의 피해를 몸에 새기고 있는 피해당사자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에 세워졌다고 생각한다. 몸에 새겨진 상처를 소녀상으로 나타내어 전쟁 범죄의 잔혹함과 평화의 가치를 말하고자 지었을 것이다.

 

 

니시노 교수는 강연의 말미에 다음의 원칙을 이야기했다. ‘일본은 가해자, 한국은 피해자라는 구도로 설정한다면, 가해자는 계속 노력을 해야 하고, 피해자는 관용과 이해의 가능성을 보여줘야만 한다. 그래야만 역사화해라는 것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진다.’ 2016527일 버락 오바마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의 원폭피해자 위령비 앞에서 묵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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