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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후기

김가연(서강대학교 사학과)

"여러분은 이제부터 조선통신사의 길을 따라가며, 자신만의 점을 만들고, 그 점들을 이어 선을 잇고, 궁극적으로는 그 선들로 새로운 면을 만들 것입니다." 신 조선통신사 프로그램 첫 오리엔테이션에서 손승철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과연 신조선통신사와 함께한 9박 10일간의 여정이 끝난 지금, 나는 처음의 의구심을 벗어 던지고 이전과는 다른 면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 찍었던 점은 '조선통신사' 자체에 대한 이해였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통신사는 생소한 단어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지식으로 조선통신사란 그저 일본에 선진문물들을 전달해주기 위한 조선의 사절단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답사를 시작하기 전 듣게 된 강의를 통해, 조선통신사는 서로 신의를 통하여 교류한다는 '통신'의 의미처럼 임진왜란 이후 단절된 국교를 회복시키고 19세기 말까지 한일 양국 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를 만들어낸 외교의 중요한 축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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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을 시작하는 역관사 조난비 앞에서. 역관사 조난비란 1703년 음력 2월 5일 쓰시마 앞바다에서 조난된 108명의 역관사 일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두 번째 점은 앞선 배움을 답사를 떠나 직접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면서 피부로 느꼈다. 먼저, 조선통신사가 일본에서 받은 융숭한 대접은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음을 알게 되었다. 행렬을 시작하는 대마도에서부터 수도인 에도까지 약 9개월간의 기간 동안 일본의 막부는 조선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실제로 통신사가 묵었던 일본의 한 섬 시모카마리에서는 통신사 접대를 위해 현 시세로 약 120억 원 정도를 지출했다고 한다. 막부뿐 아니라, 일본 국민에게도 조선통신사는 관심과 환영의 대상이었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글을 받기 위해 밤낮 가릴 것 없이 줄을 섰으며, 통신사 행렬을 관람할 때에도 예의를 갖추기 위해 2층에서는 절대로 일행을 내려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200년 전 그들의 모습이 현재 k-pop에 열광하는 일본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조선통신사들은 조선시대의 한류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조선통신사의 흔적들이 일본에 너무도 잘 보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작년 10월 조선통신사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영향일 수도 있으나, 비단 보존상태의 문제이기보다는, 해당 문화재에 관해 설명하는 관리인들의 반짝이는 열정에서 언어가 다름에도 그들이 조선통신사에게 얼마나 큰 애정을 기울였는지 느낄 수 있었다.

 

쓰시마 섬에 그려진 벽화. 한국과 일본이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두 점은 알게 모르게 경시했던 일본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만들었다. 나아가 지일(知日)을 마치 친일(親日)과 동일시하면서 일본에 대해 배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지난날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 새로운 선을 만든 것이다.

임진왜란과 한일합방의 아픔이 너무나도 강렬했던 탓일까, 우리 국민에게 일본은 반드시 멸시해야만 하는 대상이 되었다. 하물며 임진왜란 이후 파견된 조선통신사들은 쓰시마로 향하는 배에서 어떠한 마음이었을까. 그러나 임란 이후 일본의 적극적인 화해의 제스처와 조선통신사들의 대화 의지로 한일 양국은 아픔을 뛰어넘은 평화 교린을 이루었다.

외줄을 타는 것과 같은 한일관계는 서로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머리로 이해하고 있다. 우호교린이라는 역사적 명제는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시작된다. 지금이 바로 조선통신사들이 말한 진정한 '통신'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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