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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후기

천화영(서울대학교 경영학과)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재난에 맞서 일본 국민이 보여준 냉정을 잃지 않는 의연함과 질서정연한 모습은 세계를 감동시켰고많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들에게 찬사를 보내는 동시에 그들의 아픔을 공유했다특히, “내가 (비상식량을많이 사면 다른 사람이 굶게 된다.”는 일본 국민의 인터뷰 내용은 5년이 지난 것임에도 불구하고자신의 생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까지 보여준 성숙한 시민의식이 인상 깊어 아직까지도 글자 그대로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러나이러한 성숙한 시민의식은 그들 자신이 피해자일 때에만 국한된 것이었을까일본은 자신들의 역사에 관한 문제에는 전혀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특히 위안부 합의한일 군사협정과 같은 양국 정부 간 협정이 2016년 연이어 체결되며 우리나라 정부뿐만 아니라 일본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극에 달한 상태이다나 또한 일본에 대해 갖고 있던 감정이 대다수의 국민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우리나라에게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라는 애매한 포지션을 지닌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해 더 알고 싶어 본 프로그램에 지원하기는 했지만부산항을 출발해서 쓰시마 섬에 도착하기까지 일본에 대한 나의 감정은 부정적인 것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후쿠젠지에서 몸을 낮춰야만 보이는 '일동제일형승'을 아이폰의 파노라마 기능으로 담은 것이다.

쓰시마에서 에도까지 열흘 간 조선통신사가 거쳐 간 길을 답습해가는 여정은 나에게는 일제강점기와 임진왜란’ 만이 한일관계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다조선통신사는 시모카마가리에서 국 3가지요리 15가지(당시 에도 막부 연회 때 다이묘조차 국 2가지요리 7가지를 제공받았다)로 이루어진 식사를, ‘일동제일형승을 가진 후쿠젠지에서 숙소를 제공 받는 등 정성어린 접대를 받았다.

 

 이 같은 융숭한 대접에는 막부 1년치 예산 정도의 많은 지출이 쓰였을 뿐만 아니라, 1년 정도의 번 내 주민들의 준비가 필요했다고 한다. (물론열흘 간 일본에 대한 나의 인식이 드라마틱하게 변한 것은 아니다열흘간의 여정에는 미미즈카’, ‘재일한인자료관’ 같은 곳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히로시마 평화공원에서는 자신들이 원폭 피해자인 것만 강조하는 듯한 분위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역사인식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며 불편한 감정을 느꼈고조선인들의 코와 귀를 베어 묻은 곳이라는 미미즈카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인들의 극악무도한 잔인함 때문에 생겨난 말이라는 불구대천지 원수라는 말에 공감하며분노를 느끼기도 하였다.

 

그러나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교수님의 강의를 통해 배우는 동시에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필담으로 서로 간 이해를 넓혀 갔던 그 옛날의 조선통신사들처럼 시즈오카 현의 대학생들과 필담을 통해 한일 양국의 관계에 대해 그들의 생각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며 처음 출발할 때 갖고 있었던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에 조금씩 긍정적인 변화가 생겼다.

 

이와 같은 감정상의 긍정적인 변화뿐만 아니라개인적으로 또 한 가지의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한일 양국의 관계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에 대해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 조금 더 공부해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오리엔테이션 시에 들었던 기자분의 강연에서부터 여정의 종착지였던 도쿄에서 들었던 게이오 대학의 니시노 준야 교수의 강연까지 한일관계에 관한 여러 전문가들의 강연을 들으며질문하고 싶고 때로는 반박하고 싶은 순간까지 있었지만, ‘내가 질문하려는 것이 나만 모르는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아닐까라는 생각과 나의 반론에 대한 근거가 너무 터무니없는 것이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으로 인해 결국은 일정이 끝날 때까지 어떠한 나의 의견도 피력하지 못했고이번 프로그램에 있어서 가장 아쉬운 점으로 남게 되었지만.

히로시마 평화공원에서 찍은 3조 단체사진 (아랫줄 좌측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박선우, 이승규, 최병휘, 천화영, 김다름)

이번 프로그램에서는 여러 지역의 많은 장소를 탐방하였다많은 탐방지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윤동주와 정지용의 시비가 있는 도시샤 대학교다윤동주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시인으로그가 시대 상황으로 인해 요절했다는 것도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도시샤 대학교에 있는 그의 시비와 그 앞에 놓인 그의 사진을 보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가 얼마나 어린 나이에 죽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시비에 새겨진 서시를 읽으며다시는 이런 비극이 생겨나지 않도록 과거 역사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한일 양국 관계 발전에도 더욱 많은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지금까지의 모든 경험을 통해 무늬만 조선통신사였던 내가 진심으로 통신사가 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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