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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후기

장다연(서강대학교 사학과)

당시 일본이 문화선진국인 조선의 문물을 우위의 입장에서 받았다고 사실과 다르게 위조하려고 조선통신사를 환대하고 문화교류를 했던 거 아니야? 이것이 내가 처음 조선통신사에 관한 자료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삐뚤어지게 생각한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일본으로 떠나기 전 다시 조선통신사에 대해 공부한다 해도 똑같은 의구심을 버리지 못할 것 같다

현재 한국과 일본은 끊임없는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양국 간의 외교 관계가 다 그런 게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과 일본 간의 외교관계야말로 진정한 긴장감 넘치는 줄다리기 외교관계를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특히 양국이 가장 민감해지는 부분이 역사 문제에 관한 것이고 일본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국은 일본을 생각하게 될 때 대치하고 있는 역사적 주제들을 함께 떠올린다

그렇기 때문에 스포츠 경기에서 한일전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마치 이 경기에서 이기면 독도가 우리 땅이 되기라도 하는 듯이 경기에서 이기길 간절히 기도하며 응원한다.나 또한 일본과의 극심한 대결 구도가 없었던 때가 상상되지 않는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일부의 사람처럼 반일감정도 친일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는 오랜 역사적 문제 때문에 일본을 바라볼 때면 벽 하나 치고 바라보는 정도의 일본에 대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따라서 일본과 마음을 통하는 외교를 한 조선통신사의 사료를 읽는 것은 마음에 와 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본이 어떤 의도를 숨겼던 것은 아닌지 의심까지 했었다

시모노세키의 아카마 신궁 앞에서, 헤이안 시대의 안토쿠 천황이 비참하게 죽게 된 경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처음 부산에 도착해 배를 타고 쓰시마로 첫 걸음을 내딛었을 때는, 400년 전 선조들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며 그들이 남긴 유물을 보게 될 생각을 하니 너무 흥분되었다. 그 흥분감에 묻혀 조선통신사를 대했던 일본에 대한 나의 의구심은 잠시 잊혀졌다.

하물며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에도, 도로가 생기게 될지 생각조차 못했을 선조들이 화려한 행렬 속에 현재 이 길을 걸었을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충분히 벅찼다. 처음으로 묵은 숙소가 위치한 쓰시마 이즈하라 시내 곳곳에는 조선통신사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고, 사찰, 박물관을 방문할 때면 주지스님, 박물관 소장님께서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시며 조선통신사의 유물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주셨다.

선조들이 방문했던 곳 어디를 가도 옛 기록들이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는 모습, 그들의 옛 선조와 우리의 옛 선조가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필담창화를 나누던 우정은 내가 현재 아는 일본과의 관계가 아니었다.

이전에는 몰랐던 친구 같은 한일관계의 모습을 알게 되던 즈음에, ‘미미즈카’를 방문하게 된다. 미미즈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성과를 확인하기 위해 부하들에게 조선인들의 귀와 코를 잘라오게 하고, 그걸 보고 안쓰럽게 여겨 한군데 묻어 조성한 무덤이다. 국가 간의 전쟁으로 인해 아무 죄 없는 조상들이 희생되고, 그들의 코와 귀가 그들의 입장에서 불구대천의 원수인 일본에 묻혀 있는 사실이 화나고 가슴 아팠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통신사가 일본과 성신지교의 외교를 하기 전인 정유재란 때의 일이기 때문에, 일본에 오기 전 품었던 의구심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직접적인 원인은 조선통신사에게 미미즈카 근처 대불전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하라는 명을 내린 당시의 일본이었다. 임진왜란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선조들이 미미즈카가 어떤 무덤인지 아는 걸 알면서도 연회에 참석하라고 명한 것은 조선통신사에게 자신들의 권위를 강조하고 한편으로는 위압감으로 기를 죽이기 위함이라고밖에 이해되지 않았다.

여태까지 쓰시마에서부터 봐온 조선통신사의 유적들은 일본의 다른 모습은 보여주었지만, 이러한 사실은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아마 믿음의 교류를 알기 전이라면 덜 했을 충격이 그 당시에는 크게 느껴졌고, 다시 일본이 조선통신사를 대한 태도에 대해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웠던 점은 분명 충격이 이전보다 더 커진 상태에서 일본을 의심하고 있는데도 5일차 되던 나에게 ‘생각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이 느껴진 것이다. 일본에 도착하기 전에 의구심의 암묵적인 결론은 ‘일본은 다른 의도가 있었다.'이었다.

그러나 당시 미미즈카를 보면서 당장 구체적인 결론은 짓지 못했지만, 나의 사고가 이전이 결론과는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자료로만 볼 때는 믿어지지 않았던 사실들이 내가 직접 발로 답사하며 눈으로 하나하나 보는 도중에 나도 모르는 사이 마음의 벽이 한 겹씩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5일을 더 답사하고 배우며, 9박 10일의 여정을 마친 지금에서야 일본과 조선통신사의 관계가 정말 긴밀했는지, 또 그렇다면 왜 일본은 때때로 조선통신사를 배려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는지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날 아사쿠사 자유산책 시간에 센소지의 정문인 카미나리몬에서 찍은 사진이다.

‘한국와 일본은 극심한 대결구도에 있다’라고 서두에서 언급했었는데, 사실 아주 간단해보이고 우리에게 익숙한 ‘라이벌 관계’라는 말이 일본에 대한 의구심을 풀어 줄 단서였다. 한 없이 가깝게 느껴지면서도 그 속에서 경쟁의식은 놓을 수 없는 라이벌 관계가 바로 조선통신사와 일본이 아니었나 싶다.

먼 길을 걸어온 조선통신사를 극진히 대접해주고 서로 시문을 주고받으며 깊은 인연을 맺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더 잘난 모습을 뽐내고 싶어 에도가 종착지인 조선통신사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도쇼구를 보게끔 닛코까지 데려가는 등의 행동들을 보였다. 실제로 답사하고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일본과 조선통신사가 맺었던 인연의 흔적이나 신의의 증거나 믿겨지지 않아 당시 내가 알던 한도 내에서 결론을 짓다보니, 일본은 나에게 의심스러운 나라였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이 통하는 교류’가 무조건적으로 베풀고 존경으로 대하는 모습도 있지만, 근원적으로 떼어낼 수없는 라이벌 관계가 항상 내재하는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이라면 하나하나 의심되었을 만한 행동들이 일본과 한국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통해 더 이상 오해되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일본을 항상 역사적인 문제와 결부시키는 경향이 강한데, 일본을 역사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그러나 9박 10일의 답사를 마치고 난 지금, 현 시점에서는 특정 역사적 사건을 통해 일본을 바라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특정한 역사적 시선이 바로 ‘조선통신사’이다.

조선통신사가 파견된 당시, 일본인들을 바라보는 조선인들의 감정은 지금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분노로 차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일본이 먼저 손을 내밀고 화해의 마음을 전하자, 매회 차의 조선통신사가 여정을 끝낼 때 즈음에 인연을 깊게 나누지 않은 일본인이 없을 정도로 서로 가까워져있었다. 섣불리 단정하여 말할 수는 없지만 현재 한일 관계가 임진왜란 후의 관계보다 양호한데에 비해 서로 가지고 있는 악감정이 쉽게 호전되지 못하는 이유는 양국 관계의 미래를 정부에게만 너무 맡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조선통신사의 유적, 유물들이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더 많은 한일 양 국민들이 조선통신사가 어떤 사절단이었는지에 대해 알게 된다면, 선조들의 행동을 본받아 한일의 미래를 더 이상 국가에게 맡기기 보다는 우리 하나하나가 역사 문제의 벽을 걷어내고 열린 마음으로 서로에게 다가가야 할 것이다.

물론 그러는 와중에 근원적인 ‘라이벌 관계’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마찰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과 똑같았던 나 또한 9박 10일의 여정 동안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진심으로 일본과 통신하려고 노력한다면 금방 올바른 시선으로 일본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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