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그들은 목숨을 걸고 일본행 배에 올랐다. 원수의 나라를 향하는 험난한 항해, 왕복 4,800km의 먼 길에서 그들은 언제 돌아올지 예측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긴 여정이지만 통신사 일행은 그곳의 이야기에 눈물 흘리고 경치에 감탄하고, 사람들과 교류한다. 통신사 일행은 시모노세키에 도착해 아카마신궁에 머무른다. 탐적사였던 사명대사는 정쟁에 휘말려 8살이라는 나이에 바다에 빠져 죽은 안토쿠 천황을 애도하는 시를 짓고 이후 통신사들도 여러 편의 시를 남긴다. 토모노우라 후쿠젠지에서 종사관 이방언은 ‘일동제일형승(日東第一形勝)’이란 편액을 쓰고 그곳의 경치를 감탄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쇼코쿠지 지쇼인, 소안지, 세이켄지 등 조선통신사가 머물렀던 절과 신궁에선 조선통신사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조선통신사와의 만남은 일본인들에게 소중한 기억이 되었고 조선통신사가 남긴 글과 그림은 일본인들에게 보물이 되어있었다.
통신사의 발자취를 따라갈수록, 과거의 조선통신사도 일본인들과의 교류 과정에서 일본이라는 나라에 가졌던 편견이 줄어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탐방 중 만난 일본인들은 웃음기 어린 얼굴로 항상 친절함을 보였다. 또한, 탐방을 통해 일본에 대한 잘못된 지식이 많았음에 새삼 놀랐다. 역사 속에서 일본에 대한 인식은 항상 야만적이고 미개하며 우리보다 수준 낮은 국가였다. 통신사 구성원들 역시 일본을 낮추어 보았었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이러한 인식이 남아있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고대국가 시대를 제외하고 일본은 우리와 대등하거나 우리보다 앞서있는 나라였다. 일본은 문물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을 가졌지만 섬에 갇혀있지 않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더 노력했다.
여정은 마무리됐지만 후기를 쓰고 있는 지금도 솔직히 처음 가졌던 의문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한일관계도 어지럽기만 하다.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이다. 하지만 조선통신사는 조선과 일본 양국의 평화를 도모하기 위한 제도였으며 실제로 통신사가 파견되었던 200년간 평화가 이어졌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대 조선 외교를 담당했고 직접 통신사 행렬을 안내했던 일본인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는 나라와 나라의 관계에 있어 대등함을 강조했다. 그는 대등함을 바탕으로 상대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형편을 잘 이해하고 진심으로 사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을 언행으로 실행했다. 그는 조선과 일본이 성신교린(誠信交隣)의 마음으로 서로를 대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통신사와 성신교린의 가르침 모두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현재를 살고 있는 지금의 한국인과 일본인 모두 서로에게 믿음을 주고 있는지를 되뇌어 보았으면 한다. 더불어 2017년 9월경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결정된다. 세계기록유산 등재와 함께 통신사의 가치가 다시금 조명 받아 한일관계에 발전이 있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