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親日派)’.
국어사전 상에는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무리’가 첫 번째 의미로 나오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제 강점기에, 일제와 야합하여 그들의 침략ㆍ약탈 정책을 지지ㆍ옹호하여 추종한 무리’가 두 번째 의미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를 포털사이트에 입력하면 후자와 관련된 연관검색어들이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친일파(親日派)’라는 단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부정적이기만 합니다. 일부는 거부감을 넘어 혐오를 표하기도 할 정도로 물리적 가까움과는 달리 심리적 간극은 멀기만 한 것이 현실입니다.
일본에 대한 제 생각 역시 특별히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평소 중화권과 동남아시아 등지에 관심이 더 많았기에 일본에 대해서는 아는 바도 적었고 관심도도 떨어졌습니다. 물론 정치나 경제 분야는 불가분의 관계다보니 기본적인 지식이 있었지만, 탐방의 주제였던 ‘조선통신사’는 고등학교 수업 이후 들어보지 못한 주제였던 만큼 사실상 ‘백지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통해 일본을 직접 경험하며 그 인식을 그려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첫 날 만찬에서 주일 대사님 역시 적어도 이번 열흘 동안만은 일본에 대한 모든 편견이나 적개심을 버리고 순수한 시각으로 일본을 바라봐 줄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평소 외국을 여행하면서 그 나라의 문화와 다양한 풍경(도로, 건물, 사람 등)을 관찰하기를 좋아했기에 나만의 시각에서 그려낼 수 있는 일본의 풍경에 집중했습니다.
차량의 대부분인 소형 승용차와 그에 맞춘 좁은 도로폭, 호텔 욕실의 컴팩트한 구조들을 보며 그들에게 체화되어 있는 검소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는 말마따나 차량은 정지선을 칼같이 지켰고, 어떠한 정체가 있어도 절대 클락션을 울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흡연이 자유로운 분위기에 비해서 골목과 시가지들은 굉장히 깨끗했으며, 가게들 역시 자신의 건물 앞 인도를 점거하지 않는 수준까지만 물건을 진열했습니다.
길거리 맨홀 하나도 디자인을 입혀서 만들었고, 화장실의 휴지들은 귀퉁이가 접혀있어 그 시작부분을 찾기 쉬웠으며, 식당의 냅킨 역시 한 장씩 쉽게 집을 수 있도록 직사각형으로 접혀 있었습니다. 신발장 보관함은 작은 나무 조각을 이용해 잠금 기능을 더하는 등 소소한 부분이지만 일본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유의 섬세함과 배려의 문화였습니다.
오사카로 이동하는 길에는 탔던 신칸센은 외관이나 속도는 KTX와 별 차이가 없어 보였으나, 좌석의 편리함은 비즈니스 석 못지않았습니다. 게다가 64년도에 첫 운행을 시작한 이래 자체 기계결함으로 인한 인명 사고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우수한 기술력을 자랑하며 장인정신을 강조하는 일본인들의 특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10일간의 열린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그려낸 일본은 ‘꼭 한 번쯤 다시 와보고 싶은 나라’가 되어 있었습니다. 양국의 다사다난했던 역사를 공부하고 많은 강연을 들으면서 한일관계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생겼고, 일본의 ‘의리’ 문화와 ‘투철한 직업정신’ 등의 국민성을 직접 느끼고 확인하면서 마음 한켠에는 경외감까지 들었습니다.
모든 일정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자면, 아라시야마에서 있었던 일을 들고 싶습니다. 점심을 먹고 자유산책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는데, 강변의 경치를 구경하며 둘러보던 찰나 일본 전통 의상을 입고 있는 커플을 보게 되었습니다. 호기심에 다가가 사진 요청을 하면서 몇 마디를 주고받는데, 이제껏 순수한 시각으로 일본을 바라보자고 다짐했음에도 순간 삼국 간 갈등이라는 편견에만 사로잡혀있던 스스로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새 살은 상처를 딛고 돋아나건만, 아직 서로의 앙금은 쉽게 아물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라시야마에서 본 모습처럼, 젊은 청년들이 열린 마음으로 서로의 다름을 수용하다보면 언젠가는 ‘친일파’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끝은 늘 또 다른 시작을 수반하듯 이번 탐방을 통해 얻은 좋은 사람들과의 감상을 앞으로의 새로운 생활에 대한 밑거름으로 삼겠습니다. 일본에 대해, 그리고 역사에 대해 좀 더 중립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