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일본을 적이라 말한다.
누군가는 일본을 친구라 말한다.
또 누군가는 이를 절충해서 가깝고도 먼 나라라 말한다.
주관적 감상은 누구에게 강요할 수 없다. 강요한다고 진실이 되지는 않는다. 강요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건 그저 각자 다른 진실들일 뿐이고 마치 풍경과도 같다. 그저 각자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다른 풍경이 보이는 것일 뿐이니까.
내가 생각하는 우리 新조선통신사에 의의는 바로 다른 곳의 풍경을 보는 일이다. 즉 견식을 넓히고 생각을 폭을 넓히라는 말일 것이다. 나는 순수한 시각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애써 좋은 모습만 보려 하지도 않았고, 깍아내릴 점을 찾기 위해 눈을 부릅뜨지도 않았다. 그저 색다른 풍경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색다른 감상들에 충실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이런 것들이 보였다.
일본의 화장실에는 화장지 귀퉁이를 접어서 삼각형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두루마리 휴지의 시작부분을 찾느라고 공연히 두세 바퀴를 헛돌리는 일이 없다.
호텔 거울(의 얼굴 높이 부분)에는 습기가 차지 않는다. 뒤에 열선을 깔았거나 보일러 관이 지나가도록 안배한 듯하다. 그래서 면도할 때 거울을 다시 문지를 필요가 없다.
신칸센을 탔을 때 무심결에 잡았던 손잡이에 점자가 새겨져 있었다. 지나가면서 무심결에 잡게 되는 어깨 높이의 손잡이(머리받침 옆에 있는)였는데, 시각장애인들은 공연히 점자를 찾느라고 고생할 필요가 거의 없다.
식당에서 흔히 보는 티슈는 정사각형 모양이 아니라, 직사각형 모양으로 접혀있었는데, 앞면과 뒷면의 길이가 달랐다. 그래서 티슈를 집을 때 살짝 짧은 앞면의 티슈만 살짝 집어 든다면 공연히 뒤쪽의 티슈를 건드려서 손때를 타지 않게 할 수 있다. 이는 경제적인 요소를 고려한 뒷사람을 위한 배려이다. 위에서 나열한 사례들은 참 소소하고, 평범한 아이디어들이다. 누군가를 위해서 한번쯤 화장실 휴지의 귀퉁이를 접어놓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전국 모든 국민들이 매일같이 휴지의 귀퉁이를 접는다면(그리고 설계단계에서 거울 뒤에 열선을 깔거나, 티슈 공장에서 티슈를 비대칭으로 접는 시스템을 도입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소소함이 아니다. 그것은 아주 특별한 소소함이다. 소소함을 쌓아서 특별함을 만든다면, 그것은 나름의 비범함이라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내가 느꼈던 일본은 적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그냥 일본이었다. 나는 대마도 (술집)에서 ‘NOT KOREAN, NOT ALLOWED’라 쓰여 있는 안내문을 보았다. 한국에서 온 우리에게 친절하게 관광지 설명과 안내를 해 준 일본 할머니도 만났다. 평화헌법을 개정하자며 1인 시위를 하는 일본인도 보았다. 다문화 사회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말하던 재일교포 3세도 만났다. 조선통신사의 역사에 권위자인 일본인 교수도 만났다. 에너지가 넘치는 예술대학 교수님도 만났다. 능숙한 한국어로 호객행위를 하던 일본인 점원들도 만났다. 길을 물었을 때 누군가는 상냥했고 누군가는 무뚝뚝했다. 내가 총체적 일본을 감히 말하기엔, 아직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아, 말을 아끼려 한다. 다만 일본에 다시 가보고 싶다. 일본에는 평범함에서 특별함을 빚어내는 법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에.
전국 각지의 대학생들을 뽑았다. 30명의 대학생이 모였고 8박 9일 동안 다른 경치를 보았다. 때로는 위에서, 때로는 아래에서, 가끔은 곁눈질로 볼 때도 있었고, 돋보기를 들이대서 자세히 들여다 본 적도 있었다. 다른 풍경을 보았다는 것은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이 강요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이번 여행의 목적이 특정한 그림을 그리라는 누군가의 암시는 아니었을 것이라 믿고 싶다. 그저 다른 풍경을 보고 다른 그림을 그리는 법도 익혀보라는 것, 그 정도면 우리가 함께 했던 8박9일의 의미부여가 되지 않을까.
정도 많고 유쾌했던 동료들과의 우정은 덤이다. 그들을 더 오랫동안 만나고 싶다. 부디 이번 여행을 통해, 그들이 그릴 그림들이 조금 더 선명하고 풍성해지기를.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