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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후기

윤석준 (경북대 전자공학부)

통신사(通信使)의 정사(正使) 황윤길이 아뢰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담략이 넘치고 안광이 매섭습니다. 또한 병선을 많이 건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을 침략할 것이 확실합니다.” 부사(副使) 김성일이 말한다. “도요토미의 눈은 쥐새끼 같고 사람됨이 조선을 침략할 만한 인물이 못됩니다.”

우린 이후 머지않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고 있다. 국토와 민족이 유린당했고, 그것은 현재까지도 사라지지 않는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국민감정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로부터 반천년이 지났다. 나를 비롯한 서른 명의 대학생은 ‘신조선통신사’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이름을 내걸고 일본에 다녀왔다. 옛 통신사가 일본 각지에 남긴 흔적과 기록을 좇아가는 학술 탐사가 주 목적인 만큼 그에 대한 정보와 소감을 정리하는 게 옳겠지만 나는 조금 다른 주제를 후기에 담아보려 한다. 바로 8박 9일간의 여정 동안 일본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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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의 다리에 장식된 갓파 보도블럭. 다양한 모양의 갓파들이 줄지어 놓여 있어 눈길을 끌었다.

대마도에서의 이튿날 아침, 첫 행선지로 옛 대마도주 소 씨(宗氏)의 저택을 들렀을 적 할머니를 처음 뵈었던 걸로 어렴풋이 기억한다. 할머니께서는 신조선통신사 팀과는 관련이 없는 현지 주민이셨다. 피부가 희고 고우셨으며 참으로 포근한 인상을 풍겼다. 일본어를 잘 하는 학생들로부터 우리 일행의 방문 목적을 들으시곤, 대마도의 가이드 역을 자처하셨다. 반쇼인에서 서산사로, 서산사에서 오후나에로. 장소를 옮길 때마다 할머니께선 흥이 나신 듯 말씀을 이어가셨고, 그 발걸음은 우리들 청춘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우셨다. 나는 일본어가 서툴렀기에 할머니와 몇 마디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지만, 유난히 맑았던 하늘을 보며 한 학생과 주고받던 대화 중 무심코 훔쳐 들은 이 말만큼은 기억이 난다. “오늘 이토록 하늘이 맑은 건 신님께서 여러분들을 보살펴 주고 계시기 때문이에요. 정말이라고요.” 따뜻한 말이었다. 그 후로 할머니께선 일행이 큐슈로 향하는 배를 타는 순간까지 반나절을 함께 해주셨다. 

할머니를 비롯하여 내가 만난 한 분 한 분은 모두 선진국 다운 시민의식을 보였다. 재일교포 3세로서 직접 느끼신 일본의 다문화 교육의 한계와 비전을 제시해주셨던 오사카교육대학의 배광웅 교수님, 동아시아 국가 관계에 있어 넓은 통찰력을 보여주셨던 게이오대학의 니시노 준야 교수님, 손짓 발짓 섞어가며 한마디라도 더 함께 나누고 싶어 했던 오사카의 대학생들, 친절하기 그지없었던 편의점 점원부터 어눌한 말로 길을 물을 때마다 하나같이 밝은 목소리로 안내를 해주시던 도쿄의 시민분들까지. 지면의 한계로 그분들에 대해 좀 더 소개할 수 없다는 것과 표현의 한계로 그 사람들로부터 느낀 나의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할 수 없음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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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코네 종안사의 불상. 구름 낀 하늘 아래 서 있는 불상이 고독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나는 ‘신조선통신사’로서 일본에 다녀왔다. 나는 그곳에서 일본의 노인과 청년, 재일교포와 엘리트를 두 눈으로 보았다. 그들에겐 부드러운 성품과 올곧은 마음이 있었다. 일본인이 그러하니 안심하고 칠렐레 팔렐레 지내보자는 얘기가 아니다. 역사가 되풀이되지 말란 법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지만 확실히 알아둬야 할 것이 있다. 한 나라의 수장의 안광이 어떻건 자주국방은 다른 나라의 눈치를 볼 것 없이 꾸준히 노력하여 내실을 다져야 하는 문제라는 것. 그리고 일본에서 또 한 번 도요토미 같은 인물이 나온다 한들 현대사회의 일본인들이 순순히 따르진 않을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우리가 그들로부터 강해지기 위해선 단 한 명의 정치가의 낯빛을 살피려 들기보다는 1억 2000명 시민을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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