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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후기

김현수 (부산대 지리교육학과)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를 보면 조선통신사는 한 장 남짓한 양으로 서술되고 있거나 참고 자료 정도로 다루어질 뿐이다. 대학에서 배우는 역사에서도 ‘조선 통신사가 조선 후기에 에도 막부의 요구로 1811년까지 파견되었다’ 정도의 서술만 있을 뿐 내용에 있어서 큰 진전은 없었던 것 같다. 한일이 조선통신사 관련 유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고 노력함에 따라 조선통신사가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있지만 정작 당사자인 한국의 학생, 더더욱 역사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으로서 크게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크지 않았던 점이 부끄러웠다. 그렇게 조선통신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新 조선통신사 프로그램까지 참가하게 되었다. 이번 프로그램의 취지 역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조선통신사의 행적을 재조명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고 나 역시 그 취지에 부합하여 많은 것을 배워오겠다고 다짐했다. 출발 전의 나는 의욕이 충만했기 때문에 배움에 그치지 않고 나만의 생각을 가지고도 싶었고 가능하다면 일본과 소통하는 기회도 가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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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에서 만난 할머니. 탐방 내내 안내도 해주고, 항구에까지 찾아와 배웅도 해줬다.

이렇게 여러 가지 바램을 안고 마침내 9일간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처음 부산에서 페리를 타고 대마도에 도착했을 때 나는 대마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나가사키 현의 섬이라는 것이 내가 아는 유일한 정보였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깝다”는 인식의 의미였다. 단편적으로 가깝다는 정보에 가려진 가까운 만큼 이전부터 교류가 많았다는 의미를 나는 이 때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대마도에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반도와 접촉해왔던 여러 흔적이 남아 있다. 대마도 청사 뒷산에는 백제 유이민들이 당군의 침입을 방어 하기 위해 지은 백제 산성이 있고 한국과 가장 가까운 직선 거리를 가진 곳인 한국 전망대에는 조선 통신사와 역관사 108인이 파랑을 만나 모두 익사하는 대사건을 기리는 위령비가 있다. 조선 종이 모셔진 엔츠지를 지나 하 대마도로 가려면 러일 전쟁을 위해 인력으로 만든 운하가 펼쳐진 만제키 바시를 지나야 하는데 거기에는 러일의 전쟁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비극적인 근대사의 시작이 담겨 있었다. 대마도주의 저택 터 뒤에 있는 이 왕가 결혼 봉축비는 조선의 마지막 황녀와 대마도주의 결혼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한 것이나 덕혜 옹주의 비극적인 삶과 우리의 아픈 근대를 비추어 보았을 때 얼마나 아이러니 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다르게 말하면 알지 못하면 그 속의 의미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대마도에 역사탐방이 아니라 여행을 왔다면 조선 종이 모셔져 있는 엔츠지를 지나 만제키바시를 지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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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5일째 교토 방송과의 인터뷰 모습. 일본에 대한 인상과 함께 앞으로 역사 교사로서의 꿈에 대해 얘기했다.

일본 본토로 들어온 우리는 조선 통신사들이 지나온 각종 절과 그곳에서 그들이 남긴 것들을 보았다. 당시 더 융성한 문화를 자랑하던 조선의 선비들의 글귀 하나를 얻고 싶어 했고 화려한 행렬을 구경했으며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던 기록들은 일본 곳곳에 남아 있다. 오사카 역사박물관에서 특별히 공개해주신 조선통신사 행렬도는 당시 조선 통신사의 행렬이 그 시대의 일본인들에게 진귀한 볼거리였고, 그들이 통신사들을 반겼던 사실을 잘 묘사했다. 후쿠젠지, 아카마신궁 등에서 아직도 보존되고 있는 통신사들의 시, 현판은 일본인들에게 값진 선물이었음을 확인하게 한다. 통신사 그들은 왜구가 창궐하던 시대와 왜란의 혼란을 공존의 시대로 바꾸어간 실로 중요한 존재들이었음을 느꼈다. 그들의 노력은 200년간의 평화를 유지했지만 1811년 아쉽게도 끝나버렸고 그 이후 한일의 관계는 빠르게 악화되어 어두운 식민지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국의 독립과 전쟁, 경제발전의 긴 시간 속에서 한일의 관계는 계속 변해왔는데 지금 또다시 위기를 맞은 것 같다. 대마도에서 본 욱일승천기를 든 우익 단체의 일인 시위와 ‘NO KOREA’라고 적힌 술집 앞의 문구, 일본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한 의식에서 비롯된 헤이트 스피치까지 실제로 그 상황을 보게 되었다. 지금 상황이 근대사의 문제에서만 비롯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지금 한일은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있어 서로의 부분만 보고 있기 때문에 갈등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나는 이번 탐방에서 배우게 된 아메노모리 호슈가 떠올랐다. 성신, 즉 양국의 성의와 신의를 강조했던 그의 삶을 우리는 잊고 있지만 재조명 될 필요가 있다. 통신사가 남긴 모자조차 소중히 여기며 조선어를 배우면서까지 소통을 중시하던 그의 가르침은 현재에도 중요한 유산이다. 이번에 조선통신사에 대해 알아 온 만큼 그들의 교류를 본받아 상호작용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우리의 다음 과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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