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와 읽기의 달인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직후에 건조한 길이 23m, 폭 2m, 배수량 57t의 제6호 잠수정이 훈련 도중 자취를 감추었다. 1910년 4월의 일이었다. 가솔린과 2차 전지(電池)를 동력으로 삼았던 이 잠수정은 지금의 핵잠수함에 비교하자면 그야말로 장난감에 지나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최첨단 함정이었다. 수색에 나선 일본 해군은 이튿날 야마구치현(山口縣) 앞바다 수심 16m 아래에 침몰된 잠수정을 발견했다. 인양된 잠수정의 내부 모습이 가관이었다. 14명의 승무원들은 모두가 자신의 근무 위치를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은 곳에서 죽어 있었다. 정장(艇長)이던 갓 서른의 해군 대위, 그의 군복 주머니에서는 침몰의 원인과 경과, 잠수정 내부의 상황을 띄엄띄엄, 그러나 차분하게 연필로 기록한 수첩이 나왔다.
“그렇지만 승무원 일동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신의 직(職)을 잘 지켜 침착하게 일을 처리함… 12시 30분 호흡이 몹시 고통스러움…”
전등이 꺼지고 실내에 가스가 가득 찬 죽음의 상황에서도 멈추지 않았던 기록은 “12시 40분이 됨”에서 멈춰졌다고 한다. 이 해군 대위의 글을 두고 문호(文豪)로 추앙받던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는 ‘명문(名文)’이라 치켜세운 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문장이 훌륭하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성실의 극치라고 할 수밖에 없는 문장이라는 뜻이다.”
그것이 바다 밑에서의 사건이라면, 하늘에서 사건이 터진 것은 1985년 8월 중순이었다. 도쿄를 떠나 오사카로 향하던 일본항공(JAL) 점보 여객기가 추락했다. 승객과 승무원을 합쳐 무려 520명이 희생되었다.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추락현장을 정리하던 수색대원들은 종이쪽지에 황급히 휘갈겨 쓴 여러 통의 유서를 발견했다. 그 위급한 상황에서도 아내나 자녀에게 당부의 말을 남기던 사람들의 흔적이었다
도널드 킨(Donald Keen)이라는 인물은 오늘날 미국 최고의 일본연구가로 꼽힌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지방을 대지진과 쓰나미가 휩쓸자 ,미국 국적을 버리고 일본 국적을 신청하겠노라고 선언해 일본인들에게 작은 위안을 던져주기도 했다. 그는 원래 태평양전쟁의 미군 정보 분석요원이었다. 그가 한 일은 일본군 포로나 전사자의 소지품에서 수거한 일기장을 점검하여 알짜배기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일본군이 전선에서건 후방에서건, 장교건 사병이건 가리지 않고 일기를 쓴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미군이 “내일이면 우리 부대는 어디어디로 이동한다” 따위의 군사기밀을 일기장에서 찾아냈던 것이다.
잘 쓰는 사람은 읽기도 잘 한다. 그러니 인구 1억 3000만이 채 되지 않는 일본이건만,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과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의 양대 일간지만 해도 하루 발행 부수가 각각 1000만 부를 훌쩍 넘는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화제의 신간이 나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하면 100만~200만 부는 예사로 팔린다. 요즈음이야 인터넷 세상이 되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문과 서적이 앞선 정보와 문물을 흡입하는 유일한 수단이었음을 고려할 때, 경제대국 일본을 일군 밑바탕이 얼추 짐작 가능하다.
'베끼기' 에서 시작해 새로운 '만들기'로
일본이 고대로부터 한반도를 통해 전해진 앞선 문물을 전수받아 나라 일으키기를 해온 사실은 누구나 다 안다. 소설가 겸 저술가로 명성이 자자하고, 내각책임제인 일본에서는 드물게 민간인 신분으로 경제 기획청 장관에 발탁되기도 했던 사카이야 다이치(堺屋太一)도 이렇게 똑부러지게 고백했다.(『일본을 이끌어 온 12인물』)
“일본과 쿠바 두 나라 다 비슷한 거리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대륙과 떨어져 있다. 다른 점이라면 쿠바의 건너편 아메리카 대륙에는 이렇다 할 고대 문명이 없었던 반면, 일본의 건너편인 한반도와 중국에는 뛰어난 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곶감을 빼어먹듯 알짜배기만 쏙쏙 뽑아가면 되었다.”
그런가 하면 한국의 석학 이어령(李御寧)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방구부채를 쥘부채로 탈바꿈시킨 일본인의 재간을 예시하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축소지향의 일본인』)
“유럽의 경우 쥘부채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포르투갈의 상인들이 중국과의 교역을 개척한 15세기 경의 일이었다. 그것도 유럽 각국에서 쥘부채가 인기 상품으로 등장하여 사교계에서 바람을 일으키게 된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물론 그것은 모두 일본의 쥘부채였다.”
그렇게 바다 건너 한반도와 중국대륙의 문화를 흠모하던 일본의 태도가 1868년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계기로 돌변했다. 어제까지의 스승을 팽개치고 미국과 유럽에서 가르침을 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왕년의 견수사(遣隋使)와 견당사(遣唐使)처럼 구미사절단을 파견하여 서구문물 탐구에 직접 나서는가 하면, 분야별로 전문가를 불러들여 ‘쇄국(鎖國)’에서 ‘개국(開國)’으로 방향타를 돌린 효과를 극대화했다.
당시 일본이 불러들인 외국인 전문가가 1만 명을 넘었다. 6,000여 명의 영국인이 가장 많았고, 3,000명 가량의 미국인, 900여 명의 독일인, 600여 명의 프랑스인, 그리고 40여 명의 이탈리아인 순이었다. 그 무렵 일본 인구(약 3500만 명 추산)를 감안하자면 얼마나 많은 외국인이 일본 땅으로 쏟아져 들어왔는지 상상이 간다.
그런 식으로 열성적으로 배운 결과는 노벨상에서부터 슬금슬금 나타나기 시작했다. 1949년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가 첫 물리학상을 받은 이래 2016년까지 모두 25명의 이름을 수상자 리스트에 올린 것이다. 이 중에서 2개의 문학상과 하나의 평화상을 뺀 나머지는 모두 과학분야의 수상이었다.
거기에 덧붙여 생래적인 일본인들의 한 우물파기와 성실한 장사꾼 기질 역시 국부(國富)를 일구는 바탕이 되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19세기의 사상가이자 화가였으며 개혁의 리더이기도 했던 와타나베 가잔(渡邊華山)이 어느 장사치에게 적어 주었다는 다음과 같은 ‘상인(商人) 정신’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첫째, 종업원보다 일찍 일어날 것. 둘째, 열 냥짜리 손님보다 백 푼짜리 손님을 더 소중히 할 것. 셋째, 사간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바꾸러 온 손님은 사갈 때보다 더 정중히 대할 것. 넷째, 사업이 번창할수록 절약할 것. 다섯째, 한 푼이라도 지출이 있을 때에는 꼭 장부에 기입할 것. 여섯째, 항상 창업했을 때의 마음가짐을 지닐 것. 일곱째, 동일 업종의 가게가 근처에 문을 열어도 당당하게 선의의 경쟁을 할 것. 여덟째, 종업원이 독립하면 3년 동안 자금지원을 해줄 것.
우리가 저들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부정적 인식만 앞세우기 보다 우선 그들이 지닌 장점부터 살펴야하지 않을까. 그것이 진짜 이기는 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 최고의 지일 작가였던 김소운(金素雲)의 충고를 여기 덧붙이고 싶다.
“일본에 대한 민족감정 하나를 언제까지나 버리지 못하는 그런 옹졸한 백성은 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알고도 너그러이 잊어버리는 것과, 흐지부지 소가지 없는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만치 뜻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