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않는 두견새는 죽여 버린다.”(오다 노부나가)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게 만든다.”(도요토미 히데요시)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도쿠가와 이에야스)
일본 센코쿠(戰國) 시대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통일을 이룩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등 세 인물을 평가한 에도(江戶) 시대의 시가(詩歌)다. 노부나가는 성격이 불같고 잔인한 성격으로, 히데요시는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과시하기 좋아하는 인물로, 이에야스는 끈기와 인내의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세 인물의 일본 통일 과정을 빗댄, 이런 시가도 있다.
‘오다가 찧고, 하시바(도요토미)가 반죽한 천하의 떡을 앉은 채로 먹은 도쿠가와’
노부나가가 힘들여 일본 통일의 기반을 구축했고, 그 뒤를 이은 히데요시가 통일을 완성하고 죽자 이에야스가 힘 안들이고 천하를 차지했다는 말이다.
이 난세의 세 인물은 16세기 중반 센코쿠 시대의 혼란기에 태어나 각자의 독특한 개성과 전략으로 전란에 휩싸인 일본사회를 평정하고 새로운 시대를 개척했다. 이들을 차례대로 살펴보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
1467년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 8대 쇼군 후계를 둘러싼 ‘오닌(應仁)의 난’ 이후 일본 사회는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하며 센코쿠(戰國) 시대의 막이 열린다. 북쪽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 카이(甲斐)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 아키(安藝)의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 규슈(九州)의 시마즈 타카히사(島津貴久). 이런 세력판도 속에서 노부나가는 1534년 오와리(尾張, 아이치 현 서부)지방의 새로운 실력자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다 일족은 본래 바쿠후의 명을 받아 오와리 일대를 통치하던 여러 일족 중 하나였다.
18세의 나이에 오다 가문을 승계한 청년 노부나가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파격적인 행동력으로 일족의 분열을 평정한다. 이어 이마가와 요시모토군을 오케하자마(桶狹間) 전투에서 격파,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어 오와리 동쪽의 안정을 확보한 그는 미노(美濃) 지방을 장악한데 이어, 1573년 마침내 무로마치 바쿠후를 멸망시킨다. 아사이(淺井)-아사쿠라(朝倉) 연합과 다케다 기마군단을 아네가와 전투와 나가시노 전투에서 각각 무찌르는 등 기세를 올린다.
하지만 그는 아사이 가문을 지원하며 자신에게 대항하던 불교세력을 잔인하게 탄압함으로써 폭군이라는 이미지를 안게 된다. 불교의 성지로 알려진 히에이잔(比叡山) 엔랴쿠지(延曆寺)를 불태웠으며, 잇코종(一向宗·민중불교의 한 종파) 신도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노부나가는 비와 호(琵琶湖) 인근에 아즈치(安土)성을 쌓아 천하경영을 위한 본거지로 삼고, 중상정책을 펼쳐 부를 축적하는 등 새로운 기풍을 진작했다. 출신보다는 능력 위주로 인물을 발탁 중용했는데, 미천한 신분이었던 히데요시의 출세는 노부나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기나이(畿內, 교토 인근 지방의 총칭) 일대를 장악하고 일본 통일에 박차를 가하던 노부나가는 1582년 소수의 병력만을 데리고 교토 혼노지(本能寺)에 머물던 중 측근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의 기습공격에 허를 찔려 죽고 만다. 일본 통일을 눈앞에 두고 48세의 나이로 허망하게 생을 마감한 것이다. 지금도 일본어로 ‘적은 혼노지에 있다(敵は本能寺にあり)’라고 하면 내부에 반란자가 있다는 뜻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
오카야마(岡山)의 다카마츠성(高松城)을 공략 중이던 히데요시는 주군 노부나가의 죽음을 전해 듣고 전광석화처럼 철군해 미츠히데를 무찌른다. 이로써 노부나가 사후의 주도권을 재빨리 장악한 히데요시는 그의 유업을 이어받아 통일 사업을 착착 진행시킨다. 코마키(小牧)-나가쿠테(長久手) 전투에서 탁월한 외교적 수완을 동원해 이에야스를 굴복시킨 그는, 1585년 조정으로부터 간파쿠(關白) 직위를 임명받아 실질적인 일본의 지배자로 행세하게 된다. 말단 아시가루(足輕, 최하급 병사)의 자식으로 태어난 미천한 신분이 신하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직인 간파쿠가 된 것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1536년 오와리(尾張藩) 출생의 히데요시는 양부 밑에서 자라다 어릴 때 가출, 각지를 떠돌던 중 노부나가의 부하가 됐는데 뛰어난 지혜와 전공으로 일찍이 두각을 나타냈다. 아사이 나가마사(淺井長政) 가문을 멸망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그는, 나가마사에게 시집가 있던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お市)와 그녀의 세 딸을 극적으로 구출한다. 히데요시의 보호 아래 성장한 세 딸 중 장녀는 훗날 히데요시의 측실(요도 부인이라 불림)이 되어 아들 히데요리를 낳는다.
최고 권력자가 된 간파쿠 히데요시는 교토와 오사카에 쥬라쿠(聚樂) 저택, 후시미(伏見)성, 오 사카(大阪)성을 쌓아 자신의 힘을 내외에 과시하며 대군을 동원해 일본 통일을 완성한다. 서쪽 끝 규슈까지 병사를 동원해 시마즈(淸水) 가문을 평정한데 이어 마지막 저항세력인 동쪽 오다와라(小田原)의 명문 호죠(北条) 가문을 멸망시키고, 북쪽 영주들도 정복해 통일을 완성한다.
과업을 달성한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을 획책한다. 결국 임진왜란을 일으켜, 센코쿠(戰國) 시대의 혼란에서 벗어나 모처럼 평화를 기구하던 민중들을 또 한번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는다. 초반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은 이순신의 활약과 명군(明軍)의 참전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고, 고전을 거듭하다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철군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
1542년 미카와(三河, 아이치현 동부) 지방의 오카자키(岡崎) 성주인 마츠다이라 히로타다(松平広忠)의 아들로 태어난 이에야스는 여섯 살부터 인질생활을 하는 기구한 운명에 놓인다. 스루가의 실력자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세력권 하에 있던 히로타다는 오와리의 새로운 실력자 오다 노부히데의 공격을 받자 원군을 청하며 아들 이에야스를 이마가와에게 인질로 보낸다. 그 후 18세가 될 때까지 스루가의 슨푸(駿府)에서 기나긴 인질생활을 한다. 그러다가 이마가와가 교토 입성을 목표로 대군을 거느리고 출발할 때 이에야스는 그 선봉이 되어 출전한다. 이마가와군이 예상을 뒤엎고 오다군에 패하며 요시모토가 전사하자 이에야스는 그 틈을 타 비로소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에야스는 분열되어 있던 미카와(三河) 지방을 통일하고 노부나가의 일본 통일 사업을 지원하며 영지를 확대해 나간다. 오다군과 연합해 아네가와(姉川) 전투를 치르고, 나가시노(長篠) 전투에서는 당시 천하무적을 자랑하던 다케다의 기마군단을 무찌른다.
노부나가의 요청으로 항구도시 사카이(堺)를 방문하던 중 ‘혼노지의 변’을 접한 그는 영지로 급히 돌아와 군사를 정비하지만, 히데요시가 이미 반란군을 진압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히데요시가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굳히는 분주한 틈을 타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지배하에 있던 카이(甲斐), 시나노(信濃) 지역 등을 접수해 다섯 지방을 영유한 대영주로 부상한다. 코마키・나가쿠테(小牧・長久手) 전투에서 히데요시와 대립했던 이에야스는 결국 화친을 맺고 아들을 히데요시의 양자로 보낸다. 히데요시 또한 여동생을 이에야스에게 보내 재혼시키고 노모를 인질로 보내는 등 파격적인 조치로 이에야스를 자신을 휘하에 묶어두려고 애쓴다. 이에야스도 이에 대한 응답으로 교토로 상경해 히데요시에게 신하의 예를 취한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요구에 따라 근거지인 미카와를 떠나 칸토(關東)지 역으로 영지를 옮기고 에도(江戶)성에 거점을 구축한다. 내심 이에야스를 두려워했던 히데요시가 그를 권력의 핵심부에서 분리해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이런 조치를 잘 활용해 칸토 지역의 무사들을 규합, 착실히 실력을 쌓아간다.
히데요시 사후 패권을 놓고 동서 양군이 격돌한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끄는 서군을 격파한 이에야스는 명실공히 일본 최고의 실력자가 된다. 1603년 쇼군직을 임명받고 에도 바쿠후를 연다. 이후 1868년 메이지유신에 의해 근대 천황제 국민국가가 탄생할 때까지 260여 년간 도쿠가와 쇼군이 일본을 지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