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참가후기

조우주.png

 

일본은 연 700만 명이상의 한국인이 찾는 나라이다. 하지만 과거 역사로는 결코 호의적으로 볼 수 없었다. 물론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예로부터 끊임없는 전쟁과 여진과의 병자호란 등이 있다. 하지만 조선전기와 후기는 임진왜란으로 나뉘었고 우리의 근현대사를 차지한 것은 바로 일제강점기였다. 현재도 도쿄 한복판에서 혐한 시위가 벌어지기도 한다. 일본은 그렇게 가깝고도 먼 나라였다. 민간 교류는 활발하지만 반도체 수출규제를 비롯하여 정치와 역사에서는 대립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한일관계는 한쪽다리가 묶인 채 절름발이처럼 걷고 있었다. 그렇다면 모든 수교를 단절하고 전쟁을 해야 할까?

 

미미즈카(귀무덤), 그리고 히로시마 평화공원은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1625년 미미즈카에 통신사로 갔던 강홍중은 참담하고 분통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곳에는 적어도 조선인 10만명의 귀와 코가 묻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을까. 이후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지만 그 결과는 히로시마 원폭이었으며 당시 희생자는 어린 아이들을 포함한 일본의 민간인이었다. 그리고 그 10분의 1이 조선인 피해자였다. 우리는 어떤 경우든 침략과 전쟁이 아니라 공존과 평화로 나아가야 한다.

 

그 해답은 조선통신사, 그리고 아메노모리 호슈와 통신사 신유한의 성신지교에서 볼 수 있었다. 성신지교란 진실과 신뢰를 가지고 교류하는 것이다. 임란 이후 조선통신사는 목숨을 걸고 일본에 갔다. 이에 화답하여 막부는 이들을 극진히 대접하였다. 에도시대 호슈와 신유한은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쌓았으며 신유한이 호슈에게 준 유건은 아직도 잘 보관되어 있었다. 그는 임진왜란을 명분없는 살상극이라 비판했으며 귀무덤을 두고 개탄하였다.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후금이 침략하였을 때 일본에서도 조선에 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하기도 하였다. 한일관계사학자 나카오 히로시 교수에 의하면 조선통신사가 파견된 1607~1811, 200년간은 평화의 시기였다. 이 기간동안 서민생활은 안정되고 쌀 생산량이 2배로 늘었으며 상공업이 발달하였다

 

관계는 한 쪽만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쌍방이 함께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양국 간의 신뢰가 부족하면 전쟁이 일어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 국민들이 입어야했다. 외교는 실리와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 실리란, 무엇보다도 한일 양국 국민의 안녕일 것이다. 간사이 대학생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젊은 층에서부터 역사의식의 공유, 고령화, 환경 문제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한일양국은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공동으로 추진하여 333점의 조선통신사 기록물이 유네스코에 등재시켰다.

 

믿음을 통한다는 의미를 지닌 통신사,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신조선통신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요구 되는 시기이다. 조선통신사는 목숨을 걸고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타국에 문화를 전했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유산을 현재까지 소중히 보관하는 각 절의 주지스님들과 재일교포들의 참정권을 위해 싸우는 일본시민들이 있다. 재일교포들은 주일한국대사관 부지, 88올림픽 당시 500억원이 넘는 금액을 기부하였으며 일본 영화계의 거장으로 불리는 구로사와 아키라는 대지진의 시기를 소년기에 체험하여 억울하게 희생된 조선인에 관한 증언을 하고 있다. 관동대지진 100주년인 2023년이 멀지않았다. 이 때까지 진상규명이 되어야 명예회복과 유족보상이 가능하다. 이를 위하여 한일 양국의 역사의식의 공유가 시급하다. 청년인 우리들이 새로 써 나갈 민간 한일 외교관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며 어깨가 무겁다

 

 

조우주 1.png   조우주 2.png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