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평화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공유한다는 믿음으로부터
이광수에서 김윤식까지, 지난 100년 이 땅의 수많은 선학들을 심란케 했던 일본의 높은 벽은 적어도 2019년의 대학생에겐 느껴지지 않았다. 버스에서 바라본 일본의 산천은 한국과 똑같이 푸르렀다. 거리풍경 역시 깨끗하다는 인상은 받았을지언정 크게 감탄스럽진 않았다. 1980년대를 풍미한 일본의 시티팝을 즐겨듣는 나처럼, 일본 간사이대학의 학생들 역시 케이팝에 열광했다. 야마구치현(山口県)의 작은 도시 호후(防府)에서 마주친 긴자(銀座)라는 이름의 쇠락한 아케이드는, 소멸 위기에 놓인 한국 지방도시의 수많은 ‘명동’을 떠올리게 했다.
이처럼 나의 여정은 한국과 일본의 ‘격차’가 이제는 그리 크지 않음을, 그리고 두 나라 사이에는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훨씬 많음을 확인해가는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 건, 과거에 비해 훨씬 동등해졌을 뿐 아니라 닮기도 많이 닮은 한국과 일본이 최근 격렬히 부딪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간사이대학에서 한국과 일본의 대학생들이 웃음꽃을 피우고 있을 무렵, 두 나라 정상은 날선 공방을 주고받았다. 한국은 일본을 졸렬하고 뻔뻔스런 침략자로, 일본은 한국을 신뢰할 수 없는 피해망상증 환자로 몰아갔다.
매일 밤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확인하며 마음을 졸이는 날들이 늘어갔다. 이 어려운 시기에 일본에 온 게 과연 맞는 일인지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이러한 나의 고민과 불안을 해소해준 건, 여정의 넷째 날 방문한 교토의 쇼코쿠지 지쇼인(相国寺慈照院)에서 보았던 병풍이었다. 1711년 일본을 찾은 신묘통신사가 사찰의 승려들에게 선물한 한시(漢詩)와 글씨, 그림을 표구한 이 병풍은 오랜 세월 창고에 처박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주지스님께서 우연히 병풍을 발견해 세상에 공개하셨고, 이는 조선통신사가 다시금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불과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던 조선과 일본의 지식인들이 주고받은 따뜻한 환대와 우정은 내게 큰 감명을 주었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깊은 인상을 받았던 건, 두 나라 문인들의 소통을 가능케 한 매개가 동아시아 공통의 지적 자산인 한문이었다는 사실이다.
많은 한국인은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훌륭한 문물을 전해주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는다. 조선통신사를 한류의 원조인 양 추켜세우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이해가 완전히 잘못된 건 아니다. 하지만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전해준 것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특수한 ‘문화’라기보다는,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문명’이었다. 요컨대, 18세기 조선과 일본의 지식인들은 배타적인 민족주의자라기보다는 유교적 교양을 겸비한 코스모폴리탄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꿈꾼 세상은 한문을 매개로 소통하는 문예공화국이었고 말이다.
쇼코쿠지 지쇼인의 병풍은 오늘날 악화될 대로 악화된 한일관계를 풀어나가는데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18세기의 조선과 일본 못지않게, 21세기의 한국과 일본 역시 인류 보편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와 민주주의, 번영하는 시장경제, 인권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치를 기반으로 한일 양국이 서로를 인정하고, 존경할 수는 없을까? 예컨대 일본은 한국의 민주주의와 역동적인 시민사회에 찬사를 보내고, 한국은 자국의 민주화운동에 일본의 시민사회가 보낸 지지와 격려에 감사를 표하는 식으로 말이다.
1983년 6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일본의 진보 매체인 세카이(世界)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들이 존경할 수 있는 일본”이 되어주기를 요구했다. 민주주의 국가라면서도 한국의 군부독재에 침묵하는 일본을 향한 간절한 호소였다. 하지만 동시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오부치 게이죠 일본 수상과의 역사적인 공동선언에서 “전후 일본이 평화헌법 하에서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수행해온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비판도, 존경도 모두 인류 보편의 가치에 근거하고 있었다.
조선통신사가 파견된 17~18세기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는 역사상 한일관계가 가장 좋았던 시기로 기억된다. 평화란 두 나라가 공통의 가치를 기반으로 서로를 존경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누릴 수 있다는 진실을, 쇼코쿠지 지쇼인의 병풍과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