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유적과 유물을 남기고, 그 남겨진 유적과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 新조선통신사로서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 걷기 전 오리엔테이션 때 손승철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8박 9일 간의 여정에 나는 어떠한 역사적 증언을 마주하게 될 것인가.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그들이 남긴 행적을 좇아간다면 향후 한일관계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다소 복잡한 심경을 가지고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발을 내디뎠다. 두 차례에 걸친 왜란이 조선에 남긴 상처를 뒤로한 채, 일본으로 떠난 조선통신사들은 어떤 심경이었을까.
중국을 천자의 나라로 삼고 중화문명을 숭상하던 조선에게 일본은 약탈만을 일삼는 미개한 나라에 불과했다. 붓 보다는 칼을 앞세우는 야만의 나라, 조선으로부터 문화를 흡수한 나라, 일본에게 호되게 당하기 전까지 조선이 일본에게 가지고 있던 시대착오적인 생각들이다. 하지만 조선통신사가 일본 땅을 밟는 순간 이러한 편견은 산산이 깨졌다. 수십 차례에 걸쳐 조선을 유린한 ‘불구대천의 원수’, 그 일본의 실상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놀라움을 비롯해 두려운 마음까지 들었을 것이다.
국왕의 어명으로 국서를 전달하기 위해 한양에서 에도까지 떠난 왕복 4천키로의 대장정, 과거 조선통신사들이 9개월에 걸쳐 다녀 온 거리를 우리는 9일 동안 다녀오게 되었다. 조선과 교역의 창구 역할을 해왔던 시모노세키에서의 하선은 新조선통신사 역사 탐방의 시작을 의미했다.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했지만 묘하게 스며드는 일본 특유의 느낌은 늘 낯설게 다가온다. 조선 땅 이외에는 밟아 보지 못 했을 과거의 통신사들은 오죽했을까. 습한 기후, 달고 짠 음식, 익숙하지 않은 잠자리 등 처음 접하는 타국의 모든 것들에 나날이 여독이 쌓여 갔을 것이다.
힘들고 지친 그들의 마음을 헤아렸던 것인지 일본 측은 통신사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했다. 1년 막부 예산에 맞먹는 비용을 썼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아카마 신궁에서는 편안한 숙박을, 시모카마가리 마을에서는 푸짐한 밥상을, 후쿠젠지에서는 아름다운 절경을 누렸다. 원래 육류가 반입이 안 되지만 통신사들을 접대하기 위해 흑문(黒門)을 만들어 고기를 반입했다는 소안지의 일화까지 들으니 일본이 조선통신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지 느껴졌다.
'일동제일형승' 이라 불리웠던 후쿠젠지에서 바라본 절경.
조선통신사는 이러한 일본의 환대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글과 그림을 남겼다. 사절단 일행 중 박안기가 세이켄지에 들러 글씨를 남긴 경요세계(瓊瑤世界)의 의미가 아직도 인상 깊다. 한국과 일본을 ‘두 개의 아름다운 옥구슬(瓊瑤)’에 빗대어, 서로 빛을 반사해 비추어 세상을 밝히라는 의미의 경요세계(瓊瑤世界). 한일 양국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우호관계를 구축해 나가길 바라는 옛 조선통신사의 외침은 현대의 우리들에게도 큰 귀감이 된다.
탐방 중 놀랐던 점은 조선통신사가 남긴 수많은 유물들이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잘 보존되고 있다는 점이다. 유물 관리를 담당하고 계신 분들이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자료를 잘 보관해 후대에 전해주고 있었다. 관계자 분께서 두 눈을 반짝이며 조선통신사와 그들이 남긴 유물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다.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쌓았을 한국과 일본의 우정을 생각하니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조선통신사는 우리 역사의 일부분인데 왜 그동안 관심을 갖지 않았었나.
소안지에서. 탐방간 찾아갔던 방문지 모두 조선통신사의 유물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조선전기 왜국의 약탈의 시대를 공존의 시대로, 조선후기 임진왜란에 의한 전쟁의 시대를 평화의 시대로 바꾸어 간 조선통신사. 500년 전 피어난 한일 평화의 역사가 앞으로 양국 간에 지속되기를 바란다. 침략과 식민 지배의 역사로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남아있지만, 보다 바람직한 미래의 한일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역사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역사가 남긴 유물을 통해 현재를 반추해 볼 기회를 얻은 것이 이번 ‘4기 대학생 新조선통신사’를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