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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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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흔적 속에서 보인 성신교린(誠信交隣), 그리고 오늘날 한일관계.

 

신조선통신사로 선발된 25명의 대학생은 일본으로의 본격적인 여정의 시작 전, 500년 전에 조선통신사가 창덕궁에서 국왕의 어명을 받고 출발을 했듯, 우리는 창덕궁 근처 조선일보사 건물에 모여 각자의 참가 의지를 다졌다. 일본은 한국에게 가깝지만 먼 이웃이라고 인식되는 국가이다. 그 이유에는 한국과 일본과의 물리적 거리와 상호작용한 문화에 비해, 외면하기 힘든 아픈 역사가 두 나라간의 심적 거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서울에서 신조선통신사 OT를 가졌을 때까지만 하여도, 나의 일본에 대한 인식 또한 동일하였다. 일본은 한국의 근현대사에 있어서 강제동원, 위안부, 다량의 문화재 반출 등 한·일간에 해결되지 못한 많은 문제를 두고 진상규명과 진솔한 사과가 이루어지지 않는 국가로 여겨졌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거부감은 역사를 공부함에 있어서도 상당히 편파적이고 감정적인 시각을 만들었다. 따라서 나는 일본을 향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버리고 역사를 바르게 바라보고자 하는 목적을 서울에서 마음속에 새기고 이후 일정에 임했다.

 

89일간 조선통신사의 길을 따라가며 당시 조선통신사가 얼마나 후한 대접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고치소이치방칸(御馳走一番館)의 관조루에서는 조선 배의 안전한 항해를 위해 조류를 관측하였고, 고기류의 섭취가 금했던 사찰에서는 흑문(黑門)을 통해 고기를 출입하여 통신사를 거하게 대접하였으며, 아름다운 비와호(琵琶湖)를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조선인가도(朝鮮人街道)라는 길을 닦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통신사는 쓰시마(対馬)에서 시모노세키(下関)를 거쳐 에도(東京)까지의 긴 장정에 있어서 일본인들과 다양한 문화교류를 하였다. 고려미술관(高麗美術館)에서 <마상재지도>를 보며 일본이 매우 기대하였던 조선의 마상재를 확인하였고, 쇼코쿠지 지쇼인(相國寺 慈照院)과 세이켄지(淸見寺) 등 여러 사찰에서 마주했던 통신사가 쓴 현판, 시 등은 조선과 일본이 필담을 나누며 활발히 교류하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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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신사 박물관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통신사 유물이 남겨져 있는 세이켄지 본당 내부의 모습.

 

특히 나의 일본에 대한 거부감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은 간사이 대학교 학생들과의 교류회였다. 처음 교류회의 소식을 접했을 때는 걱정부터 앞섰지만, 당일날 간사이 대학생들과 신조선통신사는 몸짓·발짓·그림 등 서로 어떻게든 한마디라도 더 대화하고자, 이해하고자 노력하였고, 그 결과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두시간 가량 짧은 시간동안 진행된 교류회였지만 헤어질 때는 모두가 아쉬움에 잠겨 있었고, 서로 SNS를 공유하며 다음을 기약하였다. 막연한 걱정으로 가득했던 일본인과의 교류는 서로의 노력 끝에 이젠 인스타 DM으로 연락하며 장마로 인한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 한국과 일본은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아슬아슬한 외교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조선통신사의 흔적 속에서 깨달은 성신교린, ‘서로 속이거나 다투지 않고 진심을 가지고 이웃을 대해야 한다.’는 자세는 오늘날 한일관계의 지향점을 보여주었다. 과거 선조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서로 한발자국씩 물러나 배려하면서 서로를 이해하려는 태도는 경색된 한일관계를 풀고 친선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교본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나 또한 어느새 한국에 돌아온 후 간사이 대학교 친구를 만나러 다시 일본여행을 계획하고 일본어를 공부하고자 하는 것도 성신교린의 시작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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