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정 (3회, 연세대 경영학과 4학년)
조선통신사, 되새겨야 할 한일 평화의 역사
2017년 10월 31일, 조선통신사 관련 기록물 333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이번 대학생 新조선통신사 활동에 신청하기 위해 검색했을 때 처음 알게 되었다. 이번 답사를 떠나기 전 조선통신사에 대한 나의 지식은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고등학교 때 입시를 위해 달달 외웠던 국사책에서 조선통신사는 그리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기에 나는 그저 ‘조선시대 때 일본에 보내졌던 외교 사절’이라는 한 줄로 조선통신사를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단편적인 인식마저도 대학 입학 후 역사와 관련이 없는 전공 공부를 하게 되면서 잊고 있던 형편이었다. 그랬기에 조선통신사의 발자취를 따라간 이번 답사는 나에게 새로운 배움과 깨달음의 연속이었다.
역사 속 조선통신사는 300명 이상의 대규모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짧으면 반년에서 길면 일 년에 걸쳐 일본의 수많은 지역을 거쳐 일본 에도(지금의 도쿄)에 있는 쇼군에게 조선의 국서를 전달한 사절단이었다. 新조선통신사는 그 여정을 압축하여 9박 10일이라는 짧은 일정 동안 쓰시마에서 시모노세키, 오사카, 시즈오카를 거쳐 종착지인 도쿄까지 답사하였다. 조선시대와는 달리 빠르고 편안한 쾌속선과 신칸센, 버스를 이용하였음에도 여정은 결코 편하지만은 않았고 매일 일정을 마치면 피곤함이 몰려오곤 했다. 과거 조선통신사가 겪었을 고생에는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국서 전달이라는 국가적 임무를 무사히 완수해야 한다는 부담을 진 채 타국에서의 긴 여정을 견뎌야 했을 조선통신사의 마음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아메노모리 호슈 기념관의 관리인이 직접 만들었다는 조선통신사 지도.
이번 답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일본에서 조선통신사 관련 유물과 유적을 보호하는 노력이 꾸준히 이어져왔다는 것이었다. 답사 과정에서 우리는 조선통신사가 묵었거나 쉬기 위해 들렸던 쇼코쿠지, 소안지 등 여러 절들을 방문했다. 절의 주지스님들은 대를 이어 조선통신사가 남기고 간 글씨와 그림들을 관리해왔다고 했다. 유물들의 보존 상태는 훌륭했고, 그 의미를 설명하는 스님들에게서는 조선통신사가 남긴 유물을 관리하고 있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가 현에서 방문한 아메노모리 호슈 기념관의 관리인은 아메노모리 호슈의 생가 근처에서 자라면서 그의 사상과 인생에 감명을 받아 평생을 그의 기념관을 관리하고 홍보하는 데 바쳤다고 하였다.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던 그가 손수 그린 아메노모리 호슈의 초상화와 조선통신사 지도를 통해 자신이 지켜온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느꼈다. 또한 신기수 컬렉션이라 불리는 재일교포 사학자 신기수 씨가 오사카역사박물관에 기증한 조선통신사 관련 유물들을 통해 재일한국인들도 조선통신사의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해왔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들이 있었기에 조선통신사 기록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 값진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조선통신사의 발자취를 되짚으면서 일본 곳곳에 남아있는 우리나라의 비극적인 역사의 흔적 또한 만났다. 시모노세키 조약이 이루어졌던 장소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앉았던 의자와 함께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자 하는 야욕을 드러낸 조약의 제1조 ‘조선은 완전한 자주 독립국이다’라는 조문을 직접 확인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인을 얼마나 살상했는지 보고하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잘라다 바친 조선인들의 귀를 묻은 귀무덤 미미즈카와 더불어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투하됐을 때 희생된 조선인들을 기리는 위령비, 조선인이란 이유로 차별받고 죽임당해야 했던 재일교포들의 삶을 볼 수 있었던 재일한국인자료관 등을 방문하면서 일본으로 인해 희생당해야만 했던 한국인들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조선통신사로 상징되는 한국과 일본의 평화의 역사 그리고 한국이 일본으로 인해 고통 받았던 비극의 역사, 상반되는 역사가 얽혀있기에 현재의 한일관계가 더욱 복잡하고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해자로서 정서적으로 비극의 역사가 더 와 닿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한국인이라면 일차적으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꼈다. 더군다나 답사를 하면서 나는 여전히 박물관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침략을 조선으로의 출병이라고 표기하고 있고,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조선인 희생자들을 일본의 침략 전쟁의 일원으로서 안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일본은 결국 한일 역사문제를 어떻게든 공식적으로만 종식시키려 하고 진정으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인가 하는 불신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이 불신은 답사 과정에서 만난 친절한 일본인들로 인한 좋은 인상을 한 순간 지워버릴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조선통신사라는 평화의 역사를 보존하고 알리려는 일본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키는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중요성을 알고 있었으며 조선통신사의 정신을 이어서 현재의 한일관계도 평화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국가적 자존심과 이해관계로 인해 역사적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의 국가적 태도와는 반대로 역사적 잘못은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며, 과거의 조선통신사처럼 한국과 일본의 평화 교류의 역사를 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를 위한 노력을 지속하는 그들을 보며 이러한 이들의 노력을 더욱 더 알리고 계승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주 일본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이수훈 대사님과 함께했던 환송 만찬
혹자는 조선통신사가 조선이 일본의 재침략을 막기 위해 저자세를 취하여 억지 평화를 유지했던 굴종의 역사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답사를 통해 보고 느낀 조선통신사는 굴종보다는 상호 교류의 역사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통신사를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불리던 장소들로 데려가 극진히 대접하였다. 히로시마의 시모카마가리에는 조선통신사를 대접하는 비용을 줄여야 한다는 비판을 들을 정도로 성대하게 조선통신사를 대접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었고, 히코네의 소안지에는 원래 육류 반입이 불가한 절이지만 그 곳에 묵는 조선통신사를 대접하기 위한 육류를 들여오기 위해 별도로 만들었다는 문이 지금까지도 남아있었다. 조선통신사는 일본의 대접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글씨와 그림들을 남겼고, 그 유물들은 오랜 세월 소중하게 보관되어 왔음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의 흔적들을 보며 당시 일본인들도 조선통신사에 충분한 존경을 표했다는 것을 느꼈다. 조선통신사의 최우선 목적이 일본의 재침략을 막는 것이었을지는 몰라도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건 분명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평화적 교류였다고 생각한다. 한국과 일본이 얽힌 역사에서 한국인에게 가장 크게 인식되는 부분은 역시 일본의 침략과 식민 지배의 역사일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 비극은 잊을 수 없고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앞으로의 한일 관계를 평화롭게 유지하는 데 있어서 양국의 긍정적인 역사를 조명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답사를 통해 한국과 일본의 평화적 교류의 상징으로서 조선통신사란 역사를 더욱 주목하고 되새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新조선통신사로서 간 답사인 만큼 한일 관계에 대한 배움과 깨달음을 가장 많이 얻기는 했지만 그 외의 소중한 추억들도 많이 얻었다. 조선통신사 유적이 유명 관광지가 아닌 교외에 있는 경우가 잦았는데 그로 인해 아마 일본에 관광 여행으로만 왔으면 보지 못했을 소박한 바닷가 마을과 같은 낯설면서도 아름다운 풍경들을 접할 수 있었다. 또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전공을 가진 친구들을 만나 답사를 한 것이기에 서로 다른 경험들을 공유하면서 여러 면에서 갇혀있던 시각도 트이게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날 밤,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이니까 즐겨보자는 마음으로 몇몇 친구들과 함께 호기롭게 하라주쿠로 출발했다. 그러나 길을 잃어서 거의 두 시간을 번화가와 떨어진 주택가를 헤매다가 겨우 하라주쿠에 도착했는데 이미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있어서 화려한 밤거리를 구경하기는커녕 그대로 허탈하게 지하철을 타고 돌아와야 했다. 당시에는 마지막 밤을 그렇게 마무리한 것이 매우 아쉬웠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또한 잊지 못할 추억 중 하나로 남은 것 같다. 불과 열흘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기억에 남을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