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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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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구 (서울시립대 경제학부)

 

첫 여정인 부산에서 대마도로 가기 위해 배에 타기 직전, 배멀미가 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약국에 가서 4000원을 주고 멀미약을 샀다. 그 덕분인지 멀미 없이 편하게 갈 수 있었다. 또 히로시마에서 오사카까지 버스로 5시간이나 걸리는 길을 일본의 초고속 고속열차인 신칸센을 타고 1시간 만에 도착했다. 조선시대 때 조선통신사가 갔을 때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때는 멀미약도 없었고 열차도 없었다. 그저 지금보다 허술한 배를 타고 거친 물살과 멀미를 이겨내며 일본에 도착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대마도에 있는 한국전망대 옆에는 1703년 조선의 역관사 일행이 대마도에 도달하기 직전에 조난을 당하여 전원이 사망한 사고를 추모하는 역관사조난비가 놓여 있다.

 

이러한 힘든 여정을 거쳐 일본에 갔던 조선통신사들은 막부의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된다. 우리는 시모노세키의 아카마 신궁, 시모카마가리의 고치소이치방칸, 히코네 성 근처의 소안지 등 조선통신사들이 묵거나 환대받은 곳들에 찾아가 직접 그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특히 고치소이치방칸에 복원된 조선통신사들에게 제공된 상차림은 당시 에도막부가 1년치 재정에 맞먹는 돈을 썼다는 것이 거짓이 아님을 느끼게 할 만큼 성대하게 차려져 나왔다. 그리고 거기에 계신 분들로부터 그 당시 조선통신사들이 남긴 글과 그림 등 여러 자료들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자료들은 작년 10월 세계기록유산으로 남겨져 더욱 의미 있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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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소이치방칸의 조선통신사에게 제공되었던 식단 모형. 이것 외에도 꽃게, 가재 등 값비싼 음식들도 같이 나왔다.

 

신조선통신사로 참여한 우리들도 일본의 간사이대학 친구들과 교류회를 가졌다. 서로 의사소통은 잘 안되었지만 몸짓, 손짓까지 동원해 가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갔다. 또한 각 조마다 발표회를 가졌는데 문화나 언어의 차이 등을 적은 포스터를 같이 만들면서 더 잘 알 수 있었고 이러한 포스터들도 훗날 조선통신사가 남긴 문구들처럼 남게 될까 라는 상상까지 해보았다. 이렇게 교류회를 가지니 멀게만 느껴졌던 일본인들이 더욱 친숙하고 가깝게 느껴졌다. 일본에 오기 전까지는 단순히 일본이란 국가에 대해서만 접하여 좋지 않은 인상을 가졌지만 역시 개인 대 개인으로 만나니 내가 너무 편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민간차원의, 개개인간의 만남이 한일관계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국가 대 국가로만 접근하였던 시각들이 많이 바뀔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 같다.

 

신조선통신사 프로그램에서 또 한 가지 뜻 깊었던 것은 바로 근현대 우리나라와 연관이 있는 곳을 방문했다는 점이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로 희생된 2만 명의 한국인 희생자들을 기리는 위령비에 헌화를 하고, 도쿄에 있는 재일한인자료관에 가서 그들의 삶을 생각해 보는 등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들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교토에 있는 도시샤 대학교에 있는 윤동주, 정지용 시비를 답사하였다. 거기에 헌화되어 있는 꽃을 보고 시를 읽으며 조국의 소중함과 따듯함을 느껴 보았다. 이렇게 근현대사의 우리나라와 관련된 장소들을 방문하면서 일본과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좋든 안 좋든 간에 일본은 우리나라와 거리적, 역사적으로 함께 가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번 탐방을 통해 확인한 것 같다. 외교에는 100 0이 없다고 하신 손승철 교수님의 말씀처럼 51:49, 52:48의 자세로 나아가 지혜롭게 한일 간의 갈등을 풀고 조선통신사가 상호관계를 발달시킨 것처럼 21세기 신조선통신사들이 한일 관계 우호 증진을 위해 활약하길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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