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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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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통신사 일행이 지나간 길을 두고 조선인가도라 부르는 곳은 일본 내에서도 딱 한 군데뿐이다. 바로 오미하치만(近江八幡)에서 히코네(彦根)에 이르는 길이다. 혼간지(本願寺) 하치만 별원을 나와 북쪽의 하치만 공원 쪽으로 조금 걸으면 오미하치만의 중심가인 교카이도(京街道) 상점가가 나온다. 시골인데도 번화했던 옛 모습을 간직한 상가가 제법 잘 형성되어있다.

  교토를 출발한 통신사 일행은 대개 오쓰(大津)에서 점심을 먹고 모리야마(守山)에서 숙박, 다음날은 하치만(八幡)에서 식사, 히코네(彦根)에서 숙박하는 일정으로 쿠사쓰(草津)에서 나카센도(中山道·교토에서 에도로 가는 길 중 중부 내륙지방을 종단하는 길)로 접어든다. 비와호수(琵琶湖) 동쪽 호반으로 난 나카센도는 오미하치만을 지나면서 갈라져 비로소 조선인가도가 된다. 조선인가도는 유키하타(行畑)에서 비와 호수를 따라 히코네의 도리이모토(鳥居本)에 이르는 40km의 길이다. 통신사는 때로는 히코네 모리야마(守山)의 도몬인(東門院)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조선인가도를 따라 나고야(名古屋)로 길을 재촉했다.

  오미하치만 시립자료관 앞에는 어른 허리 정도쯤 미치는 높이의 조선인가도 표지석이 서 있다. 이 표지석은 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20여 년 전 한 일본인 연구자가 조선인가도를 답사하고 세워놓은 것이다. 가도(街道)라고 해봐야 도로의 폭이 고작 4~5m쯤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원래 이 길은 교카이도 또는 하마카이도(浜街道), 고쇼카이도(御所街道)라고 불렸다. 모두 천황이 있는 교토를 오가는 길이란 뜻이다. 후에 조선통신사가 통행하면서 일본인들이 조선인가도라 부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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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가도의 기원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아즈치성(安土城) 축성 때 교토까지의 길을 연결한 것에서 비롯한다. 나카센도(中山道)의 "카미카이도(上街道)"에 대해 "시모카이도(下街道)"로 불리거나 비와호수를 따라 이어져 "하마카이도(浜街道)"라고도 불린다. 일설에는 일본의 좁은 지세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우회하는 구부러진 길을 통행시켰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다이묘(大名)의 행차와 맞닥뜨리지 않도록 하고 때로는 500명에 달하는 사절의 숙박, 휴식처를 생각하면 히코네나 하치만을 지나는 것이 가장 적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길은 통신사뿐 아니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길이었다. 그것은 16009월 도요토미 사후 천하의 주인을 가리는 세키가하라(ヶ原) 전투에서 비롯되었다. 이에야스의 동군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측의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가 거느린 서군을 격파하고 교토의 천황을 만나러 갈 때 이 길로 갔기 때문이다. 이후로 이 길은 경사스러운 길이라 하여 역대 쇼군이 천황의 거처가 있는 교토의 고쇼(御所)를 방문할 때만 이용했다. 당시 에도를 오가는 지방의 번주인 다이묘조차 밟을 수 없는 쇼군 전용 도로였던 셈이다. 쇄국정책으로 일관한 에도 막부는 조선과 류큐(琉球, 지금의 오키나와), 네덜란드와만 교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부 측은 류큐 사신이나 네덜란드 상관장(商館長)이 에도로 쇼군을 만나러 오갈 때도 이 길을 통과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이 조선인가도는 1607년 첫 사절단이 일본에 왔을 때 다른 길이 아직 정비되지 않아 막부가 자신들의 위신을 고려해 좋은 길을 내줬고, 후에 이것이 관례가 되어 통신사가 지나가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거나 이 길은 쇼군과 통신사만이 밟을 수 있는 길도(吉道)였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더불어 막부가 통신사의 여정에 이 길을 통과하도록 해 자신들이 자랑하는 천하의 명승지 비와호수를 볼 수 있도록 배려했던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에도 막부는 조선인가도의 관리와 정비에 특별히 힘썼다. 막부는 통신사 일행이 도착하기 7개월 전부터 오미하치만의 도로 정비에 관한 지침을 시달하곤 했다. 도로를 평탄하게 하고 길가의 민가를 보수하며 가로수를 정비하라는 것 등을 포함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로 정비 비용이나 통신사 접대 비용은 모두 조선인가도 변의 마을들에 부과되었다. 그 부과금이 적지 않아 마을 사람들이 면제를 요구하는 문서 등이 제법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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