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동안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온 섬 쓰시마. 쓰시마는 세종 때 일본에서 조선으로 가는 일본인과 일본 선박의 도항 허가증인 문인(文引) 발급권을 독점했다. 이후 조일 관계에서 그 역할을 강화해 나가고 조일 무역의 수혜도 입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할 조짐이 있자 이를 막기 위한 노력을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그의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선봉장이 되는 등 쓰시마는 일본과 조선 사이에서 다양하게 등장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쓰시마는 일본 막부의 지시에 따라 조일 교류를 회복하는 데 노력했다. 조선 후기에는 대조선 외교와 무역을 총괄하는 번(藩)으로 인정받아, 부산 왜관에 오는 관료, 외교관, 상인, 군인 등 모든 일본인은 쓰시마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통신사가 일본에 갈 때 필요한 절차, 의식 등 사전 준비 또한 쓰시마와의 협의를 통해 진행되었다.
통신사가 부산포에서 출발해 처음으로 도착하는 일본 땅이 쓰시마였다. 통신사가 조선으로 돌아올 때 마지막 점검을 하는 곳 역시 쓰시마였다. 통신사 선박 6척 뿐 아니라 10척이 넘는 호위 선박도 함께 운항했기 때문에, 쓰시마는 대규모 선단이 정박하기 위한 선창 수리 등 통신사 맞이용 준비를 대대적으로 했다.
특히 1811년 통신사의 최종 목적지는 에도(江戸)가 아니라 쓰시마의 후츄(府中)인 역지통신사(易地通信使)였기 때문에 쓰시마의 준비는 남달랐다. 사절단의 규모가 축소되어 통신사 선박은 4척이었지만, 에도에서도 조선 국왕의 국서를 받아야 하는 고위 관료들이 쓰시마로 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1811년 통신사는 1811년 윤(閏) 3월 13일 쓰시마 북단에 도착한 후, 7월 2일 부산 영도 앞바다로 돌아왔다. 그러므로 쓰시마는 수개월 동안 통신사가 머물 숙소를 정비해야 했다. 조선에서는 역지통신을 주도한 역관들이 1805년 죽음에 이르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역지통신이 확정되지 않았지만, 쓰시마의 사정은 달랐다. 1805년 12월 쓰시마 코쿠분지(國分寺)에 통신사가 묵을 객관을 만들고, 주변 도로를 확장하기 위해 토지를 매수한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통신사에게 제공할 음식, 응접 인력 준비 등은 막부의 재정을 지원받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