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조선통신사, 21세기여 응답하라
표은혜
숙명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역사문화학과 석사과정(수료)
2018년 답사를 마지막으로 코로나 탓에 일본을 다시 찾은 것은 약 5년 만의 일이다. 오랜만에 찾은 여름의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미친 듯 뜨거웠고, 습했다. 문득 5년 전 나리타에서 동기들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두 번 다시 여름에 일본에 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우습게도 나는 그때와 같은 시기에 또 여권에 일본 입국 스티커를 붙였다. 수백 년 전 왜란이 끝나고 도쿠가와 막부의 요청에 결국 시모노세키로 왜국의 땅을 딛은, 조선통신사의 발자취를 좇기 위함이었다.
근 몇 년 동안 뉴스는 온통 좋지 않은 소식으로 가득했다. 명동과 종로, 서울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일본어는 듣기 힘들어졌고 짧은 휴가에 찾던 일본은 어째 입국에 눈치가 보였다. 우리도, 일본도. 양국의 언론은 듣기 불편한 이야기로 가득 찼다. 이후 들이닥친 코로나는 그 틈을 더욱 벌렸다. 짧지 않은 그 시간 동안 나는 많은 일을 겪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고, 공부를 이어갔다. 역사를 전공하는 입장에서 지금의 시국이 향후 어떤 기록으로 후대에 남을까 하는 고민도 있었다. 고작 석사인 전공생의 작은 생각이었지만, 내게는 오래전부터 늘 같은 의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영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일까?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를 전공한 입장에서, 더욱 배척적인 뜻을 고수하게 되지 않느냐고. 오히려 반대였다. 현대의 인류는 과거의 기록, 즉 역사에서 답을 찾는다. 답은 쉽게 도출되었다. 왜란과 강점기. 중세사와 현대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것도 맞지만 그만큼 함께한 세월도 오래라는 점을 말이다. 그리고 조선통신사는 그에 대한 명료한 해답이기도 했다.
조선통신사는 대마도에서 그 일정을 시작하나, 우리의 일정은 약 9개월의 대장정을 8박 9일로 단축한 일정이었기에 시모노세키부터 시작했다. 히로시마-후쿠야마-오사카-교토-나가하마-시즈오카-도쿄로 이어지는 일정은 일반적인 일본 여행과는 달랐다. 이것은 분명한 ‘답사’였고 옛 조선통신사의 발자취를 따라 밟으며 ‘21세기 조선통신사’로서의 민간 외교 기행이었다. 보통의 일본 여행이었다면 경험하기 힘들었을 일본 소도시와 각 지방을 밟았다. 단순히 조선통신사의 자취만 쫓는 것은 아니고, 현대사의 흔적도 함께 찾았다. 우리는 각 지역의 방문을 통해 분명한 답을 찾아야 했다. 조선통신사는 왜란을 겪은 이들이었고, 우리는 외교 분쟁을 겪고 경색되었던 관계가 그나마 풀리고 있었다. 수백 년 전의 조선통신사도 우리도. 복잡한 마음을 안고 일본행 배에 몸을 실었음이 분명하다.
솔직하게 밝히고 시작하자면, 나는 일본에 딱히 적대적인 감정은 없다. 물론 우리에겐 해결할 과제들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함께’ 전진해야 하는 과제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과거를 잊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 현실적이라 생각했다. 마냥 미워하기엔 일본도 사람 사는 나라인지라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흔히 뉴스에서나 볼 법한 ‘혐한’과 ‘K-POP’과 ‘K-드라마’에 열광하는 ‘친한’이 공존하는 국가다. 우리나라도 똑같다. 적대적인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모두 공존한다. 인간의 군상을 단 한 면만 가지고 단언하기 어려운 이유와 같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은 모르는 것처럼, 쉽게 판단하기 어렵고, 그래서는 안된다 생각했다.
조선통신사의 흔적을 찾기 위해 찾은 사찰과 각 유적지에서는 관계자분들이 나오셔서 설명을 해주셨다. 그리고 대부분 결론은 같았다. 수백 년 전 조선통신사는 일본을 찾았고, 막부에서는 그들을 크게 환대했으며, 조선통신사가 지나는 길은 곧 문화와 교류의 길이었다. 그것이 21세기에도, 우리 신조선통신사를 통해 다시금 재개된다면 너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5년 전 일본에 방문했을 때를 떠올렸다. 나리타에서 도쿄 시내로 들어오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지하철 이용을 위해 교통카드를 발급해야 했는데, 아무리 키오스크와 디지털에 익숙한 세대라 하더라도 외국의 지하철 카드 발급기는 영 어렵기만 했다. 동기들과 한참을 헤맬 때 뒤에서 낯선 어조의 익숙한 언어가 들려왔다. ‘한국인입니까? 도와줄까요?’ 어린 딸 둘을 데리고 계시던, 아빠와 비슷한 연배의 남자분이었다. 유창한 한국어는 아니었지만 우리는 그분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교통카드 5장을 발급할 수 있었고, 몇 번을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드렸다. 아마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는 30분은 더 그 앞에 붙잡혀 있었을 것이었다. 일본은 그런 국가였다. 뉴스를 보면 어라? 싶다가도 실제로 찾으면 어? 싶어지는.
조선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왜란의 수습이 끝나기도 전이다. 직접 보고 겪은 왜국은 분명한 적국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찾은 왜국은, 정확히는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에도 막부로 정리한 히데요시 이후의 일본은 또 달랐다. ‘고치소 이치반칸’에서는 사전에 통신사의 취향까지 조사하며 성대한 식사를 접대했고 각 지역을 지날 때마다 통신사의 글귀를 얻고자 소동(小童)까지 붙잡으며 종이에 조선인들의 글자를 얻고자 했다. 동래성을 공격하고 한양까지 올라왔던 왜군과 왜국 땅의 사람들은 같은 사람들이었지만, 또 달랐다. 통신사는 그 틈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마냥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러기엔 조선은 분명한 ‘명분’과 ‘실리’를 좇는 국가였다. 조선사 전공자로서, 가끔 속상한 것이 조선은 ‘명분’에 사로잡혀 ‘실리’를 찾지 못했다는 오해인데, 오히려 그보다는 ‘명분’에 입각해 최대한의 ‘실리’를 추구하고자 한 국가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지금 현대의 대한민국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국가는 당연히 최대한의 ‘실리’를 추구하고자 한다. 조선통신사 또한 마찬가지로, 철저히 ‘실리’에 입각한 외교를 추구하고자 했다. 지금의 우리가 경색되었던 관계를 개선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일본과는 잊을 수 없는 과거를 공유하고 있지만 동시에 고대부터 오래도록 교류해온 과거도 함께 공유하고 있다. 조선은 왜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통신사 파견 요청을 경계하면서도 오랜 논의 끝에 통신사 파견을 결정했고, 그 파견은 조선 말까지 분명히 이어졌다. 비록 막부가 쇠락하는 말기에는 여러 이유를 들어 통신사가 대마도까지만 갔지만, 그 이전까지 에도 막부는 막대한 지출을 감수하며 조선통신사를 환대했다. 게다가 에도 막부는 쇄국 정책을 고수해 교류하는 국가가 많지 않았다. 몇 소수의 국가조차 교류할 수 있는 지역이 극히 제한되어 있던 상황에서 조선통신사가 외교 사절로서 받았던 대우는 가히 파격적이라 할 수 있겠다. 누군가는 ‘굳이 그랬어야 했나’라고 하겠지만, 일본은 ‘굳이’ 그러는 것을 이어갔다. 조선의 입장에서 통신사를 파견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기 때문에 통신사 파견을 이어갔다.
도쿄에 들어와 마지막 대사관에서 만찬을 진행할 때, 대사님을 비롯한 관계자 분들을 만나 뵙고, 실제 외교 현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한 것은 ‘외교는 현실이다’라는 점이다. 희망과 생각만 논하기엔 실제의 이점을 따지고, 그것을 추구해야 하는 일이라는 점이다. 단순한 감정으로 손바닥 뒤집듯 뒤집기엔 너무 많은 것이 엮여 현실적인 감각을 더 중요시해야 하는 것이 바로 외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 신조선통신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외무고시는 통과하지 못했지만, 민간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현재를 보고, 미래를 직시하는 것이다. 한 가지를 보기보다 여러 면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그동안 생각한 일본이 아니라, 느낀 일본이 무엇인지 직접 느끼는 것이 중요한 논점이란 뜻이다. 오히려 직접 느낀 일본이어야 더 명백히 논할 부분은 논하고, 나아갈 부분은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흔히 그동안 일본을 ‘가깝지만 먼 나라’라고 불렀다. 당연했다. 일본과 거리는 너무나 가깝다. 부산에서 대마도까지는 당일치기 여행이 흔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이고 국내의 공항에서는 가장 가깝고 편리한 여행지로 일본의 각 지역에 취항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와 일본은 가깝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에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감정은 거리와 별개로 영 멀기만 한 것이 현실이다. 한일전은 가위바위보도 질 수 없다고 하고, 일본과 엮이면 이상하리만큼 감정이 격해진다. 지난 과거의 역사가 우리에게 새겨준 DNA일지도 모른다. 지나간 역사의 기록은 인류의 학습이 된다. 우리는 수많은 역사 중 너무나 큰 아픔을 가깝고 먼 이웃에게 겪은 과거가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과거를 잊으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던 것보다 가깝고, 또 가까운 것이 일본이라는 뜻이다. 고대 일본의 도래인에 대한 기록, 중세시기 조선과의 교류,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너무나 많은 교집합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기록을 써나갈 필요가 있고, 그 기록에는 과거가 그러했듯 일본이 우리의 기록에 나올 빈도가 높을 것이다. 그 기록은 물론 현재진행형이다.
감히 과거 조선통신사들의 감정을 유추할 수는 없겠지만, 나리타 공항에서 수속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영 아쉬움이 가득했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조선통신사들의 발걸음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반가움과 함께 가슴 한 구석 존재하는 아쉬움은 분명 일본에서 얻은 새로운 감정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좋은 인상을 주었다. 과거 조선통신사의 기록을 간직하며 앞으로의 한일관계에 대한 희망을 품은 이도 있었고,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일본에 남게 된 재일 한국인들의 ‘얼’과 ‘한’도 있었다. 영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이들의 교집합은 결국 ‘현대에서 살아가는 우리’라는 점이겠다. 결국 일본에서, 한국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입장이다. 나는 거기서 아쉬움을 느꼈다. 내가 잠깐씩 마주한 그 현실의 순간들이 앞으로의 미래라는 것을 감히 판단하고 논하기에는 짧게만 느껴졌던 일정인 탓이다. 8박 9일, 짧지만 긴 여정은 인천공항에 도착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신조선통신사’로서 가졌던 시간이 끝났다. 하지만 생각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다시 통(通)해야 한다는 것, 8박 9일 동안 온몸으로 느꼈던 우리의 연결고리가 끊기지 않도록 이어가야 한다는 것.
모 드라마의 엔딩 나레이션이 떠오른다.
21세기 新조선통신사로서의 8박 9일은 끝났다. 빠르게 지나간 시간은 심장 깊숙이 스며들어 생각의 가지를 뻗어나간다. 지금은 새롭게 통(通)해야 하는 시간이다. 21세기의 조선통신사가 부활해야 하는 시간.
들리는가, 들린다면 응답하라.
21세기 우리, 바로 지금을 살아가는 통신사 모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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